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부 Mar 23. 2022

언어의 재발견

10. 자살

최근 미남의 대명사로 불리던 프랑스 영화배우 알랭들롱의 안락사 결정이 화제다. 안락사의 한자어를 풀면 '편안하고 즐거운 죽음'이다. 유럽의 일부 나라에서는 합법이지만 아직은 통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만 허락된다. 하지만 스위스는 다르다. 통증과 관계없이 타인의 도움을 받아 죽을 수 있다. 알랭들롱이 스위스를 선택한 이유다. 이는 '자살'과 다름이 없다. 


반면 우리나라는 '존엄사'까지 허용하고 있다.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되면서, 생을 더 이상 연장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의료진이 판단한 경우에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의미의 '존엄사'이다.  

https://www.lst.go.kr/main/main.do 


사고를 조금 더 확장해보자. 통증의 고통이 아닌 생을 더이상 이어가고자 할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없는 것일까. 


종교에서는 자살을 금기시한다. 삶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기독교 국가에서는 오래 전부터 전쟁을 통해 신의 영역을 침범하였다. 수 없이 많은 이유로 타인을 죽여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기독교 나라 미국은 여전히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에 대하여는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 말하면서도, 국가가 타인의 목숨을 끊는 행위에 대하여는 침묵한다.      


자살을 결심한 사람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건 어떨까. 안락사를 위한 서약서를 작성하고 정해진 날짜까지 정기적으로 상담을 하면서 다시 생을 이어갈 희망의 기회를 주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선택하면 병원에서 고통없이,  사회적으로도 혼란이 없는 죽음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이 아닐까.

 

나는 희망한다. 대한민국에도 누구나 쉽게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자동차에서 가스를 틀어놓거나 강물에 뛰어들거나 산에서 목을 메거나 여관방에서 동반자살을 하지 않는 세상을 희망한다.

자살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자살'이란 단어가 사라지길 희망한다.



작가의 이전글 언어의 재발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