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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Sep 13. 2023

씨보다 강력한 전복 <자산어보>




맛있고 튼실한 옥수수를 먹을 때, 조선시대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종자가 좋은 옥수수라 역시 맛있다." 


2023년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혹시 중국산인가?" 

"맛은 있는데 익히는 데 좀 걸리네." 

"옥수수집 사장님 좀 불친절 하더라고." 

"이 옥수수 별론데, 청와대 청원 올릴까?" 

(대체로 서로 말이 안 통함)


영화 <자산어보>의 거가댁은 이렇게 답했다. 


 "씨가 아무리 좋아도 땅이 안 좋으면 싹이 안 나요."


이준익 감독이 말하는 조선시대의 페미니즘이자, 휴머니즘이다. 


권력 싸움에 도태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 보내졌다. 유배의 껍질은 천주교지만 본질은 혁명이다. 

정약전이 하늘님(종교)을 배신하고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앙심이 얕아서가 아니라, 그 신앙이 가리키는 세상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천주교니 서양 문명이니, 하는 어줍잖은 믿음보다 강력한 건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사랑임을, 약전은 알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사랑은 드물게 혁명처럼 피어오른다. 


약전은 흑산도로 떠났다. 깊고 검은 섬에서 만난 건 창대. 양반집 서자인 창대는 태어날 때부터 혁명같은 건 모른다. 망둥어의 주둥이, 문어의 빨판 같은 걸 보고 자랐다. 못생긴 망둥어가 배 곯은 백성들에게 주식이 될 수 있단 사실은 창대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런 진리는 발에 치이게도 흔한 것이어서 창대는 정약전이 왜 망둥어 따위에 관심 갖는 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창대에겐 열등감이 있다. 타고난 서자에게 논어니 맹자니 하는 자들의 뜻을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족보가 없던 창대는 성리학에 목이 말랐다. 그래서 대역죄인 유배자 정약전과 세상의 진리를 거래하기로 했다. 조선시대, 글이 고픈 서자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탈출구였다. 논어를 배우는 대신, 바다의 생태계를 알려줬다. 


망둥어의 번식이, 논어의 가르침보다 귀한 것임을 그 때의 창대는 알지 못 했다. 


흑백 필름으로 뒤덮인 <자산어보>의 흑산도 풍경은 사뭇 수묵화다. 정조의 술친구였다고 알려진 정약전은, '자산'으로 명명한 깊고 검은 섬 흑산도로 쫓겨나 혁명을 실천했다. 정조에게 신하의 가장 큰 덕목은 '버티는 것'이라고 배웠듯, 약전의 혁명은 수묵화처럼 느리고 짙었다.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쓸 때, 정약전은 창대에게 배운 바다의 진리를 착실하게 써내려갔다. 


뿌린 씨만큼 거두는 밭도 중요하다는 걸, 임금의 뜻만큼 백성의 삶이 가치 있다는 걸, 약전은 기록했다. 


창대는 장원급제(?) 하고서야 스승의 뜻을 알게 된다. 늘 그렇듯, 스승이 죽은 뒤다. 앎은 삶보다 느리다. 나랏님에 대충 가까워진 창대는 고통 받는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신 주먹질로 깨달음을 대충 뭉개고 만다. 또 늘 그렇듯, 제자는 스승보다 못 하다. 


지문에 색이 바래 흐릿해진 책장을 넘기느니, 눈 앞의 선명한 삶을 산다는 것.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숙제다. 



*역사 속 진실은 알지 못 한다. 이 글은 영화 <자산어보>에 대한 리뷰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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