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위대한 수업 <인정투쟁_악셀 호네트>
모든 사회는 인정을 위한,
투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뿐이다.
헤겔, 독일 관념론 , 19c
초기 이론, 인정받기 위한 투쟁
인간은 필연적으로 인정받으며,
동시에 필연적으로 인정하는 자이다.
헤겔은 사람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성공적으로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다. 오히려 갈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즉 인정은 갈등을 수반한다.
헤겔의 사상을 좀 더 현대화해서 정신 분석적으로 해석하고, 인정과 인정 투쟁이라는 의미를 구체화하려고 했다. 연구는 이 사상을 계속 발전시키는 연장선이 됐다.
인간은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이 개념은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했고, 나라마다 시각도 다르다. 여하튼, 타인의 인정을 받고, 사회의 소속감을 느껴야 잘 살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이성을 도구화하는 게 문제이다 -프랑크 푸르트 학파
연구는 헤겔도, 프랑크 푸르트 학파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회의감을 품으며 거리를 뒀다
학파는 자본주의의 사회 통합 능력을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고, 하위계층이 자본주의의 성공적으로 통합했다고 봤으나 이 또한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온 사회에 투쟁이 만연했다.
그래서 연구 관점은 내재적이기도 하다. 초점은 사회적 불평등이 미치는 감정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감정은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가령, 무시당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나 수치심, 일부 상류계층은 특혜를 부끄러워한다.
연구 연혁, 인정을 둘러싼 갈등 양상을 개념화하여다음과 같이 분리하고 정리해보았다.
이유 1 ]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
우리는 구성원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 사회의 일원이 되거나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다. 이는 내밀한 욕구이다.
이유 2 ] 타인에게서 가치를 확인받고 싶은 욕구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한 확인을 갖고 싶어 한다. 어릴 때부터, 어린아이들은 부모나 애착 대상이 능력을 인정해 주길 바란다. 부모나 애착 대상이 아이의 성취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아이가 느끼는 실망의 경험은 엄청나다.
쟁점 1 ]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가치, 그리고 노력에 대해 어떻게든 확신을 얻고 싶어 한다.
우리가 능력이나 자아 정체성에 확신을 얻으려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확인받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쟁점 2 ] 인정하는 사람이 나를 평가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따라서, 내가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내가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게 전제가 되어야 한다. >> 우리는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온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건 이상하고 뒤틀린 기대이다.
쟁점 3 ] 인정할 만한 것에 인정을 바라고 있는가?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믿는 능력이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런 능력이 없는 경우가 왕왕 있다.
,
다음 글에서 쟁점 3가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쟁점 1 ] 인정받지 못했을 때 우리는 굴욕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사람은 고립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가 지녔거나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능력을 사회로부터 확인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이는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갈 의지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가 소중하다고 느끼는 것을, 타인에게서 인정받는 것이다. 만일, 인정받지 못한다면, 살아가는 데에 /자신감/이나 /자아 존중감/이 없어지는, 본질적인 결핍이 생긴다.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 감정, /자부심/ 말이다.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감정이며, 모두 삶에 꼭 필요한 감정들이다.
이는 어린아이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발달 과정에는 늘 타인들이 있고, 성장 과정에서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는 심리가 점점 발달하는 셈이다.
잘못된 사회화로 인해 괴물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부모로부터 관심받지 못하고 방치된 어린이는, 자기 자신과 긍정적인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평생에 걸쳐 어려움을 겪는다.이런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신뢰의 개념이 없다. 타인에 대한 신뢰는 부모나 애착 대상의 애정과 사랑을 통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타인에게도 가치 있다는 기본적인 신뢰가 생기지 않으면, 그 아이의 삶은 평생 그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인정 투쟁의 과정 역시, 다른 사람들보다 험난할 수 있다.
인정받은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을 상상해보아라. 미국 남부에 살던 노예를 예로 들어보자, 이 노예는 단 한 번도 존중받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살면서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다는 건 아무리 노예라고 해도 말이 안 된다.
노예도 부모로부터 인정받았을 것이다. 또, 고용된 노예들끼리 문화를 만들어서 노예들은 내면에서 동기를 쌓았을 것이다. 존중은 인간관계에 기본적인 것으로, 타인에게 최소한의 존중조차 못 받으면 고통스럽다. 애초에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인정의 경험을 거칠 수밖에 없고, 누구나 인정을 경험한다. 그렇지 않다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능력이나 가치를 칭찬하려면, 인정하는 사람도 그 가치를 존중한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고 그 가치를 함께 지켜야 하는 걸 전제한다. 이는 그 가치에 따라 살기 위해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우정을 쌓은 두 친구는 스스로 행동을 자제할 줄 안다. - 헤겔
타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나 또한 가치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행동과 거리를 두어야 하고, 나의 이해관계만 따지면서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 헤겔은 이를 자제심이라고 했다.
자제는 자유의 최고 단계이다.
-헤겔
또, 칸트는 자기애를 절제해야만 타인을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향성을 억누르고 지배할 수 있는 힘은
인간이 소유한 자유이다.
-칸트
즉, 인정을 바라는 쪽보다 인정하는 쪽이 자제심을 발휘해야 한다. 이는 인정의 능동적인 면이고, 인정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인정을 바란다는 것은 그 사람의 판단력을 믿는다는 뜻이다.
바둑을 생각해보자. 바둑 선수로 인정받으려면, 바둑을 두는 사람들한테 인정받아야 하기에, 바둑 공동체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사회적 상호작용이 이러하다. 우리는 내가 인정하는 대상에게서만 인정받기를 원한다. 사회생활의 기본 원리이다. 상대가 사회적 가치가 없어 보이면, 우리는 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인정은 상호적이다. 이는 헤겔의 초기 이론과도 통한다.
헤겔의 성공적인 인정조건, 양쪽 모두 상대를 인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정은 사회적 현상으로 성립될 수 없다.
인정을 원해도 될 때와 원하지 않아도 될 때가 있고,
내가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하면서 인정받아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인정받을 능력과 그 특징은 사회적 규칙을 따라야 한다. 게임에서 정한 대로 해야 한다. 인정은 사회적 규칙으로 정해 놓았다. 각 사회마다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물론, 다양한 관점은 존재하지만, 개괄적인 틀이 존재하고 그 규칙 또한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
예) 전근대적인 사회를 예로 들어보면,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사람이 더 인정받았다. 그 시대에는 나이가 지혜와 경험의 증거였고. 그 사회의 규칙이었다. 반면, 오늘날에는 나이가 인정의 대상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능력이 절로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의 형태와 조건을 오늘날 기준으로 말하겠다. 한 가지의 가치로 모든 게 형성되지 않는다.
계층이나 신분으로 명확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봉건시대와 다르게,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욕구나 감정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사회적 규칙이다. 모든 이에게 내 감정과 욕구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개인의 욕구나 감정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타인과 친밀한 관계부터 형성해야 한다.친밀한 관계일 때 개인의 감정과 욕구를 인정받을 거라고 기대할 수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만 가능한 인정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인정의 형태 : 사랑]
사랑은 상호 인정(상호 존중)의 형태이다.
친밀한 관계에서만 정당화할 수 있고, 애정과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친밀한 관계라면, 나의 욕구와 감정을 상대가 받아주길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럼 나는 인정받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반면, 상대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상처가 크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하는 관계는 가족/친구/연인 관계일 수도 있고, 결혼이라는 제도적인 관계일 수도 있고, 열린 연애관계일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관계에서 사회적 규칙은 가장 사적인 욕구와 감정은 인정받을 것을 기대해도 된다는 뜻이다.
개인의 욕구가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는, 그 규칙을 위반한 관계이다.
친밀한 관계는 내가 존중받는 관계이다.
이는 따뜻한 종류의 존중이다. 여기서 기대하는 인정은 배려와 애정 어린 관심이다.
첫 번째 형태의 인정인, 사랑은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인정은 감정적인 형태로 열려있고, 애정과 관심의 형태로 나타난다.
연애의 시작이 바로 인정의 상호작용인 건 아니다.
애정과 끌림, 매력, 우연적인 변수 일수도 있다.
요즘은 연애관계에도, 사회적 규칙이 적용된다.
상대방과 나의 욕구를 인정해야 한다.
이런 관계도 단연 상호성이다.
이에 따라, 사랑이라는 인정 형태는 고유한 갈등과 투쟁이 따른다.
이다.
가족이나 우정 같은 친밀한 관계는 /독립적인 부분/과 /함께 하는 부분/의 //균형을 잡기 위한 투쟁//을 피할 수 없다. 항상 갈등이 있다.
그렇다면, 개인의 욕구와 감정을 위해 어디까지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또 상대와 어디까지 함께 할 수 있는가?
이게 사랑에 있어서, 근본적인 갈등이라고, 정신분석학에서 설명한다. 중요한 건 밸, 런, 스
애정 전선은 개인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인 젠더갈등도 치고 들어온다.
인정받아야 하는 개인의 욕구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이 명확한 사례일 수 있다.
서프러제드 , 20c초, 여성 참정권 운동
지난 200년간 페미니즘 운동, 수동적인 틀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으로 여성들의 욕구도 상호 인정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연애관계나 가족관계도 달라졌다.
욕구 변화로 인한, 관계의 재정의로 인한, 갈등이다.
여성들이 전통적인 역할에서 벗어나며 마침내 인정받게 되었다. 오늘날, 가족, 연애관계는 여성의 욕구와 감정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에서 시작된다. 사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갈등은 새롭게 생겨난 욕구들에 의해 발생한다.
타인의 자기 결정권을 어디까지 인정할까?
개인의 자기 결정권은 현대사회에서 존중받아야 할 핵심적인 권리가 되었다. 개인의 /독립성/과 /자기 결정권/은 특정한 형태로 인정된다. 그게 바로 법이다.
현대의 법에서는 사회의 모든 성인 구성원이 /자율성/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정했다.
자유는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음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89-1791)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서 서로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곧 존중이다.
법은 우리가 스스로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게 해주는 선물과도 같다. 자기 자신의 관계에도 도움이 된다.
내 욕구와 감정을 인정받으면서,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우리는 자신감을 얻는다. 법을 통해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고, 스스로 자율성을 인정받는 존재라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물론, 갈등과 투쟁이 따른다.)
현대의 법으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은 무엇이 있을까?
갈등 1] 어떤 주체의 권리가 필요할까?
어떤 주체의 권리가 확보되어야 나의 자율성을 보장해줄까?
현대로 오면서, 자율성과 자기 결정권을 인정받기 위해서 자유에 대한 권리뿐만 아니라, 사회적 권리도 중요하다. 우리는 사회적 권리를 보장받기 때문에 자율성을 인정받는다. 질병에 걸리거나 실직을 해도 비교적 온전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자율성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 역사는 지난 200년 동안 이어져 왔다.
갈등 2 ] 누가 어떤 권리를 누리는가?
우리는 어떤 소수에게 권리를 부여하는가?
특별한 권리 보호가 있어야만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집단도 있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는 성적행위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인정의 형태는 가치부여(능력)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능력에 따라 차등 대우한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능력은 모두 인정받는다. 이를 /사회적 평가/라고 한다. 이는, /법적 인정/과는 다르게 위계적 구조가 있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능력은 높은 대우를 받고,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으며, 성과에 대한 차등 보상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은 의미가 없었지만, 현대 시민은 개인의 능력을 높이 사야 한다고 투쟁했다.( 프랑스혁명, 1789-1794, 절대왕정의 구체제 타도> 근대사회로의 길을 연 시민혁명)
여기엔 많은 논란이 있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이 사회의 큰 기여를 한다고 주장했고, 노동계급은 반발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첨예한 대립이었고, 가치부여를 둘러싼 투쟁이다.
>>모든 사회는, 모든 시대는, 누가 얼마나 가치를 인정받을지를 두고, 갈등이 발생한다. 이런 갈등은 앞으로도 격렬해질 조짐이다.
우린 어떤 형태의 인정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격 장애가 일어나서, 사회가 병든다. 법적인 인정은 논란이 일어날 소지가 없다. 하지만 현대의 법 원칙은 모든 사람이 법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결정권을 가진 개인으로 산다.를 전제한다. 이는 곧,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때 차별받지 않을 권리이다.
그렇지만, 사회적 평가는 이와 다를 수 있다. 법적으로는 단순하지만, 개인의 활동은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정의 병리는 사회적 규칙을 어겨서 발생하는 부당이 아니다. 사회적 규칙을 왜곡하는 현상이다.
병리란 인정을 왜곡한다.
왜곡하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원인 1] 사회적 규칙이 타당성을 잃고, 인정의 기준을 결정하는 사회적 규칙이 모호해지거나 타당성을 잃었다면, 그 규칙은 사람들의 신뢰를 잃는다.
예를 들어 특정 성과가 너무 높은 평가를 받는다면, 사람들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능력이 공익에 도움이 된다면, 그만큼 받을 자격이 있다고 가치를 인정한다. 사회적 평가의 오용은 자주 발생한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타당성을 잃고, 구성원들은 사회적 규칙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원칙 자체가 의심을 받는다. 인정 질서에 대한 신뢰를 잃는 게 병리이다.
원인 2] 개인에게 있어서, 사회적 인정에 대한 과도한 갈망, 인정에 대한 굶주림이 생겨난다. 사람은 누구나 존재감을 얻길 바란다. 그런데, 과도하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사회는 사람의 욕망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 사회는 이런 강박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고립되어 살면서 도 인정을 과하게 찾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정신 분석학에서 이를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르고, 심리학에서는 관심 중독 이라고 정의한다. sns나 유튜브가 이걸로 돈 버는 플랫폼이다. 심해지면 중독이 된다. 인정에 대한 중독은 어디서 일어나는지 명확하지 않다. 사회적 존재감을 갈망하는 경향은 다른 곳에서 인정받지 못해서이다. 인정을 대체할 걸 찾고.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해서 엉뚱한 데에 가서 보상을 찾는다. 이는 사회 전반에 존재하는 병리이다. 인정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 반증이기도 하다. 정신 역학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변화는 채워지지 않는 관심 결핍이다.
헤겔이 주목했던 병리 현상, 인정의 게임 속에서 길을 잃을 때 나타나는 병리이다. 인정받을 수 없는 곳에 가서 인정을 찾을 때, 인정을 세 가지 쟁점으로 명확하게 나눠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가족이 서로를 법적인 주체로만 대한다면 어떨까?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감정에 반응하지도 않고 계약관계와 갖다면 어떨까?
헤겔은 만일 가족이 법적인 공동체로만 취급받는다면, 가족 구성원도 본인들의 처지를 오해한다.고 봤다. 가족/애정관계/친구 각각 다른 사회적 규칙이 적용되는 것을 모를 테니 말이다.
인정의 질서에 왜곡이 일어나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사회적 평가에 따라, 사회적 권리나 주체적 권리가 좌우될 경우이다. 미국에서 탈세를 하고도 밀린 세금을 감면받거나, 범죄를 저지르고 돈을 써서 빠져나가는 경우에 , 한 가지 규칙이 다른 규칙을 밀어낸다.
우리는 현대 사회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어떤 병리가 위험한지 또 이런 병리가 우리가 소속된 사회에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인식하려고 시도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사회적인 자유이기 때문이다.
인정받기 위해 투쟁할 필요가 있다.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교수님의 말을 글로 옮겨 적다 보니, 마치,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기 위해, 태어난 개체 1 이 아닐까, 새삼 기분이 묘하다. 속된 말로. 개X마이웨이는 본능을 거스르는 표현이었으며, 나는 진짜로 인정받기 위해 태어났구나.겸손함이라는 미덕을 배웠다.
지난 개인사를 돌이켜보면, 사랑은 전쟁이 맞았다.
역사는 투쟁이고, 인생도 개인적인 역사로, 투쟁의 서사가 맞는 셈이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나는 나를 지켰다. 앞으로도 자신을 지킬 요량으로, 글로 기록해 보았다. 글이 길어서, 브런치 인정은 받을 수 없겠지만, 내가 악셀호네트 논문을 인정하는 셈 치자. ( 잔망 ) ( 맹랑 )
역사는 아(我, 나)와 비아(非我, 나 아닌 상대)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아나 아와 상대되는 비아의 아도, 역사적인 아가 되려면 반드시 양개의 속성의 요하나니, 1) 상속성(相續性)이니, 시간에 있어서 생명의 끊이지 않음을 말함이요, 2) 보편성(普遍性)이니 공간에 있어 영향의 파급됨을 말함이라. 시(時) 지(地) 인(人) 세 개는 역사를 구성하는 3대 원소다. -신채호_조선상고사
아이의 첫 움직임은 비록 자기 중심적일망정 분명 타인을 향한 움직임이다. 생의 첫 순간부터 일종의 공존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공존을 우리는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킬 수 있다. 실제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이 모든 장애와 불투명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아를 넘어서 타인의 자아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나와 너와 우리를 껴안는 책임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요는,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은 인식이지만, 또 인식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에게 투명하다면 타인의 불투명성은 인간의 가능성 안에서 투명해질 것이다. - 에리히프롬_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희망의 전신은 고통이며, 그것을 긍정해야 ‘생존’이 아닌, “삶”이 있다. -세계일보_[한귀은의멜랑콜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