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함과 거리가 먼 성격이다. 기분 나쁘면 나쁜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멋대로 표출하는 스타일이라 우울함이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 가끔 쓸데없는 자괴감에 빠져 하루 이틀 무기력하게 보내기도 하지만, 곧잘 잊어버린다. 것보단 외로움에 취약한 편이라 곁에 누군가 사라지는 것에 굉장히 민감하다. 잡고 싶은 사람들일수록 쉽게 사라진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스물넷, 6개월 정도 상해에서 살았다. 내 삶에서 단기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났던 시기다. 두 번째 어학연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첫 일주일은 굉장히 불안하고 외로웠다. 다행히 얼마 못 가 금세 한국인 학생들과 친해졌고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 같은 기숙사에 사는 사람들, 처음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동생들, 여러 그룹과 어울리게 됐다. 그들과 돌아가며 어울리느라 매일, 매주가 바빴다. 중국어 공부도 즐거웠고 상해의 핫스폿을 돌아다니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재밌었다. 연수 기간을 한 달여 정도 남겨 두었을 때, 그 애를 만났다. 정확히는 다시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K는 연수 초반 J의 친구로 한 번 인사를 했던 기억이 있지만 강렬하진 않았다.
다시 만난 곳은 훠궈 식당에서였다. K는 빨간 체크 남방에 검정 진을 입고 당시 유행하던 나이키 에어포스 하이를 신고 있었다. 그 차림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앨 만난 이후로 나는 나이키 신발만 보면 심장이 떨릴 정도였으니까. 12월 중순부터 크리스마스, 연말까지 K는 우리와 어울렸다. 정확히는 나, 동생 H, 그 H를 좋아하던 오빠, 그리고 K 이렇게 넷이 자주 놀았다. 나는 K에게 단숨에 빠졌다. 그는 그다지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말을 재미있게 잘했다. 늘 비슷한 옷차림이었는데 그것마저 멋있었다. 그 애는 내가 지낸 기숙사와 꽤 떨어진 곳에 있는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 수업이 없을 땐 우리 기숙사에 계속 머물렀다. 한 일주일은 내내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같이 어울렸다.
나는 그때 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집과 멀리 떨어진 타국의 도시였기 때문일 것이다. 상해의 가장 근사한 야경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던, 그에게 난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 앤 물론 데이트 신청인 지도 몰랐을 거다. 내가 연락을 했고 아마도 그는 같이 어울리던 일행들과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둘은 신천지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와 그린티 프라푸치노, 시나몬 브레드를 먹었다. 내가 골라 온 빵을 보며 K는 자신과 취향이 맞다며 좋아했다. 그 빵을 고른 내 손을 마구 칭찬하고 싶었다. 푸동에 위치한 좋은 백화점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주문을 잘못해 너무 적게 나온 음식을 보며 우린 크게 웃었다. 백화점엔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고, 덕분에 더 로맨틱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던 근사한 야경 스폿을 함께 걸었다. 정말 제대로 된 데이트 코스였다. 복선은 있었던 것 같다. 그 앤 H와 H를 좋아하던 오빠와 함께 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고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는 상해의 와이탄을 혼자 걸었다. 설레는 마음을 다스릴 방법이 딱히 없었다. 상해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장소에서, 상해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애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태어나서 남자에게 처음으로 하는 고백이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난 먼저 누구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물론 티 나게 행동은 했을지언정) 전화는 바로 그 애에게 하지 못했다.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H동생에게 걸었다. H는 K를 바꿔주겠다며 힘내라는 응원의 말도 잊지 않았다.
- 혼자 어디 돌아다니고 있냐, 추우니까 어서 기숙사로 와.
“……”
- 아, 무슨 할 말 있어? 빨리 말해.
나의 침묵을 못 이긴 그 애는 조금 짜증 냈던가.
“ 네가 자꾸 그러면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 더 힘들어지잖아.”
내 말이 끝나자 침묵은 그 애에게로 넘어갔다. 한숨인지 그 애가 피우는 담배 때문인지, 깊은 숨소리만 이어졌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애는 그 자리에서 담배를 재떨이 가득 차도록 피웠다고 한다. 전화 통화만으로는 답답했던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다시 K와 카페에 마주 앉았다. 당연히 대답은 거절이었다. 평생 좋은 친구로 남자고, 그렇게 말했던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한국에 돌아와 그 애와 같이 어울리던 동생 H가 사귄다는 걸 알게 됐다. 싸이월드를 미친 듯이 뒤졌고, H의 다이어리엔, ‘피자 여섯 조각 먹는 K와 햄 볶는 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게 마지막 소식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던 SNS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으로 점차 변했다. 페이스북 시절에 겨우 찾아 K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를 정말 친구로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는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난 결국 걔가 어떻게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 애와 나 사이에 공통점이었던 J에게도 물어봤지만 연락처를 알 수 없었다. 내가 그토록 싫었던 걸까, 다시 한번 좋아한다고 매달리기라도 할까 봐 그랬을까 왜 내 인생에서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궁금하다.
삶에 머무는 사람은 적은데 사라지는 사람은 참 많은 느낌이다. 관계가 내 의도대로만 된다면 사람은 외로울 일도 슬플 일도 없겠지, 이 글을 적는 순간에도 K가 다시 나타났으면 좋겠다 싶다.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 중에 다시 기회를 준다면 잡고 싶은 사람은 그 애뿐이다. 서른 다섯 인생 중, 함께 한건 고작 한 달이었는데, 왜 아직도 난 그 신천지 스타벅스에 가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