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어떤 것

by 아메리카노

인생의 책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들으면 너무 곤란하다. 차라리 재미없는 책을 말해달라고 하면 훨씬 수월할 정도로 책은 웬만하면, 재밌다. 특히 끝까지 읽었다는 것자체가 나쁘지 않은 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생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굉장히 쉽게 떠오르는 몇 작품들이 있다. 허세기가 조금 있던, 책을 좋아하던 문학소녀 시절에는 영화 역시 사유가 깊어야 훌륭한 것이라 생각했다. 누가 날아다니거나 초능력을 쓴다든가 하는 영화에 대해선 들은 척도 안했다. 그런 나의 인생 영화는 ‘번지점프를 하다’였다. 너무 옛날 영화라 자세한 내용이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고등학교때 비디오로 무려 3번이나 봤다.

누구와 사랑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으면서 그 영화는 내 마음에 꽂혔다. 당시를 조심스레 추측 했을때 팬픽을 즐겨 읽던 고등학생이었고, 은근 슬쩍 퀴어물인척 하는 영화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환생을 해도 서로를 알아보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몇번을 죽고 다시 태어난대도, 결국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 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지녔기 때문이라죠.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을 사랑합니다.’ 영화 속 유명한 대사다. 사랑했던 여자와 헤어지고 평범한 교사로 살던 남자에게 다시 돌아 온 사랑은 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부정하고 끝내 인정하고 마는 그 과정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이 줄도 없이 번지점프를 하는 장면을 본 이후로 내 버킷리스트는, 번지점프를 하는 것이었다. 마음과 머리에 남는 이야기여야만 인생 영화로 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 나는 누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을 신나서 이야기한다. 예전엔 유치하기 짝이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벌써 어벤져스 시리즈를 열 번도 넘게 봤다. 그리고 맘 편히 뭔가 집중해서 보고 싶을 땐 꼭 어벤져스를 본다. 사람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취향은 순식간에 뒤집힌다. 나 같은 경우는 대개 큰 상처를 받았거나 할 때 바뀌었다. 캡틴 아메리카2가 마블 영화의 첫 관람작이었는데 그때 나는 4년째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 받았었다. 아픔과 충격에 벗어나기 위해 루틴을 바꾸는 셈인데, 조금씩 그렇게 일상에 변화를 주다 보면 또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동안 슬픔을 잊게 된다. 아마 살아가면서 터득한 나름의 방어기제인 것 같다.

연달은 연애 실패로 인해 나는 꼬박꼬박 드라마를 보던 루틴도 바꿨다. 내 인생 드라마는 ‘프라하의 연인’이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모두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최애를 꼽으라면 그 작품이다. 그래서 나중에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신혼 여행을 간다면 꼭 프라하로 가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인생작들을 통해 버킷 리스트를 만드는 듯, 번지점프와 프라하) 대사를 외울 정도로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고 또 보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요일별로 드라마를 챙겨 보던 나였는데 요즘은 꾸준히 보는 드라마가 아무것도 없다. 사랑도 연애도 이젠 나와 너무 먼 이야기라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그냥 예능이 제일 좋다. 인생 예능은 무한도전과 신서유기이다. 스무 번씩 봐도 웃음이 난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어떤 것은 들어도 사실 별로 와닿지 않는다. 살면서 심장을 두들기는 인생의 것들은, 보통 그 순간의, 그 시간에 처해있는 내 상황이 작용하는 경우가 크기 때문이다. 지금껏 내가 꼽은 작품들이 누군가에는 별 볼일 없는 것들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가끔 똑같은 것에 감동하고 눈물나게 웃는 사람을 만나면 몹시 반갑다. 나와 비슷한 상처나 시련을 겪지는 않았을까, 비슷한 상황에 즐거움을 느끼지는 않을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묻게 된다. 인생 영화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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