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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막 Apr 13. 2022

EP02 촛불 같은 소리 하네

너한테나 추억이지

https://brunch.co.kr/brunchbook/mofdrunkcinema


<메모리아, 드렁크 시네마> 윤의 시점, 위 내용을 읽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내가 사랑받은 적이 없는 인간이라 그랬다. 내 나름의 변명을 또 구질구질하게 해보자면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가정에서 마저 게임에 밀려 방치당하다시피 자라서 그랬다. 사랑이란 단어를 들을 수 있을 때라고는 두들겨 맞은 다음 날 타인의 말을 빌려 듣는 부모님의 변명이 전부였다. 나는 사랑을 몰랐고, 굳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런 나와 달리 너는 참 내게 열심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날 위해서 밤잠을 설치며 내 옆에 있어 주었고, 도망치고 숨어버리는 날에는 어떻게든 찾겠다며 온 동네를 뒤집고 다녔다. 나였으면 정말 끝내고 말았을 문제였는데 너는 고작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버텼다.


  굳이. 이렇게까지 연애를 해야 하는 걸까. 잠들 수 없는 수많은 밤을 흘려보내며 나는 늘 생각했다. 네가 나한테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 희생에서 뭘 얻을 수 있는지, 급기야 짜증에 못 이겨 인신공격까지 하는 나인데, 왜 사과 한마디에 화를 풀고 마는지. 내 세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네가 사과했으니까 용서할게, 를 너한테서 처음 들어보았다. 정말로 너는 내 세계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당하던가, 먼저 공격하던가. 내 세상의 유일한 선택권이었는데 그 공식이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내가 너무 멍청한 인간이라서일까. 그제서 세상의 공식이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사람을 믿으면 나는 피식자의 역할을 맡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피식자가 된 너는 불행해지는 걸까. 내가 본 너는 그다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태평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이기적으로 굴만큼 굴어서야 눈에 들어온 장면이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 역시 너를 사랑하기로, 내 선 안에 너를 초대하기로 한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나를 배신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떻게 한 결심이었는데. 내가 너를 가볍게 보았듯이, 너 역시 내 울타리의 존재를 쉽게 생각한 탓이었다.


  일련의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내가 괜히 인간 불신이라고 말한 게 아니지.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까지는 가능해도 너에 대한 온전한 믿음은 갖지 못했다. 내가 유독 의심이 많은 인간인 것도 있지만, 우리 둘 다 윤리관이 박살 난 인간이고, 여태까지의 대화들이 서로에게 신뢰를 주기엔 너무나 먼 것들이 아니었는가. 친구로 있으면서 솔직했던 시간이 되려 독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랑 있으면 안심이 되었다. 나만 공감 능력 없고 냉한 인간이 아닌 것 같아서. 너 역시 다른 사람에게 정 없고, 지독할 것만 같아서 괜스레 혼자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너도 나와 같은 것이라고 내 멋대로 착각해버렸다. 외피의 재질이 같다고 해서 같은 부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네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외피를 단단하게 만드는 인간이라면, 나는 되려 통각을 죽이며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에 온 힘을 다하는 유형이었다. 그게 착각의 시작이었다. 외면은 비슷할지언정 속은 달랐다. 그때부터 시작된 오답의 연속이었다.


  너는 그렇게 말했지. 만약 우리를 술로 비유하자면 같은 독주일 것이라고.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보드카, 너는 진이라고 했지. 차갑고 깔끔하지만 목 안으로 넘기는 순간 화끈거리는 강렬함을 주는 보드카와 어디에나 어울리지만 본연의 향은 잃지 않은 채 가장 두드러지는 진.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사람들 속에 늘 속해있고 싶어 하고, 그러면서도 너의 본연의 느낌 그 자체를 잃지 않는 게 딱 너 같았다. 그리고 네가 본 나는 의외였다.


  ‘윤도 멀리서 보면 냉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뜨거운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모르고 있었다. 그의 속에 존재하는 불길이 따스한 촛불 정도가 아닌 분노로 가득 찬 횃불과도 같았다는 걸.’


  따스한 촛불이라니. 정말 안 어울리는 말이었다.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쓴 거야 아니면 강조하려고 그렇게 표현한 거야?’ 라는 물음에 너는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야. 너만 몰라.’ 내가 촛불처럼 보였다면 그건 다행이겠지. 애쓴 만큼 결과가 나왔다는 거니까. 하지만 우리의 갈등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 역시 우리가 같은 스피리츠인 만큼 비슷할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처럼, 되려 독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는 끝내 개성 다른 독주일수록 다른 술과 어우러지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네가 생각보다 나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외로워졌다. 선 안에 사람을 들어오게 하자마자 맞이하게 된 감정은 지독한 고독이었고, 곧 그 감정은 두려움으로 모든 것을 압도해버렸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느끼는 생각은 단 하나다. 어떻게든 너에게 상처 주고 싶다. 그 일로 우리의 몇 년을 버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나 분명한 것은 나는 그 후로 너를 증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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