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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막 Apr 04. 2022

EP01 옆 자리가 비었으면 채워야지

너한테나 추억이지


https://brunch.co.kr/brunchbook/mofdrunkcinema


<메모리아, 드렁크 시네마> 윤의 시점, 위 내용을 읽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당시 나는 들떠있었다.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만큼 내 인생에서 들떠있던 때가 없었고, 그게 너랑 사귀었던 이유의 전부였다. 너는 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너의 태평하고 자아도취적인 삶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선 내가 없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내 스무 살은 나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스무 살이 되자 끊긴 지원과 하루가 멀다 하고 나가는 아르바이트, 그리고 먼지가 가득한 고시텔. 그곳에서 나는 살아있음에도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일종의 도피였다. 즐거움에 온몸을 맡겼다. 자극을 위해선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캘린더를 빼곡하게 채우며 약속을 잡았고, 술자리에서 상대방의 이름조차 묻지 않은 채 놀던 날들을 이어갔다. 이리저리 부유하듯이 온갖 인맥을 타고 돌며 사람을 만났다. 그래야 내가 웃는 얼굴로 있을 수 있었고, 그러다 보면 정말 즐거운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사실 나를 지우고 싶었다.


  너는 처음부터 나한테 관심이 없었다. 물론, 내 착각이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래서 네가 좋았다. 우리의 첫 만남은 개판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삭막했고, 당시의 나는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입시날에 친구가 허락 없이 부른 처음 보는 애. 너는 무죄가 맞았지만 내 기분이 그게 아니었다. 그날 나는 고까운 표정으로 너한테 시선조차 주지 않았고, 그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럼에도 너는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되려 나에 대한 인상을 1도 남기지 않았으며 무심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아무것도 그려내지 않았다. 네 앞에 있자면 나는 어쩐지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너한테 찾아가곤 했다. 무심한 표정, 마주치지 않는 시선, 없다시피 한 나에 대한 생각. 나는 그런 것들을 편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너한테 말할 수 있었다. 사실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돌린 결과 너는 나한테 어떤 관심도 없을 것이라 여겨 나온 말이었다. 우리는 어차피 서로가 보여주고 싶은 면 밖에 보지 못하잖아. 그게 당연한 거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잖아. 그렇다면 A가 나한테 A1의 모습만 보여 준다면 내게 있어 A는 그저 A1이 아닐까. 우리가 온전한 A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고 기만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A1은 내게 새롭게 정의된 B가 될 거고, 나는 점점 B를 곱씹다 씹어보다가 그 모습이 어느새 C가 되어 버리면 어쩌지.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것은 결국 C가 아닐까. 우리는 C를 보며 A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잖아.


  나는 다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동시에 타인에게 내 모습 그대로 드러낼 각오조차 되지 않은 겁쟁이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내 말에 동조하길 원하면서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었다.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 홀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겨질까 봐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그래, 이 말은 결국 길고 긴 나의 변명이었다. 내가 A1의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해 내가 아닌 결국 C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건 내 업보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 나름의 결심이었다.


  그랬기에 술 먹고 키스한 그날 역시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나는 너를 너무 쉽게 대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좋아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나고 나서 떠올려보면 짐작이 가는 것들은 참 많았지만, 그럼에도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는 미안하지만 하나였다. 내게 있어 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에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쁜 놈은 결국 나 혼자였음을.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별 거 없었다. 내가 정신을 덜 차려서였다. 너는 네 전 애인과의 이별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분간 비밀 연애를 하자고 말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응 백일. 백일 정도 겨우 갈 연애. 그렇게 보였다.


  우리 둘의 연애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눈치 없고, 말실수가 잦은 너. 사회성이 없다고 애들한테 늘 책잡히곤 했지만 너는 그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식으로 무시로 일관했었지. 나는 그 기분이 싫지 않았다. 어쩐지 내가 너보다 사회적이고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아서 은연중에 사람들 앞에서 그런 부분은 강조하기도 했었다. 너와의 연애는 그랬다. 나만 나쁜 놈이 아닌 것 같았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무언가의 동질감에서 시작된 안심이었다.


  오래 사귀면 예쁜 연애일까. 이제 사귄 지 7년이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우리가 예쁜 연애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저분하고 추잡스럽지는 않지만 폭력적이고 몰상식하다. 서로의 말과 행동들이 이기적이고 미개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나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결함과 결핍을 타인에게 들킬까 봐 우리의 문제를 숨기기 급급한데 너는 전혀 그런 모습이 없더라. 되려 사과하고 반성하는 인간이 되다니. 치사하기 짝이 없다. 안타깝게도 나는 지난 7년간 겪은 일은 많지만 반성한 부분은 없어서 더 나은 인간은 되지 못했지만 지난 나의 생각 정도는 말해도 상관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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