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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브로 Feb 28. 2022

알고리즘이 날 취준생 시절로 이끌었다

헛개잡상인, #8

오래전 정주행을 완료한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이 유튜브 에 뜬다. '여~ 장그래, 오랜만이야~' 영상 한창 장그래와 그 동기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 보다. 희한하게도 암울했던 취업 준비생 시절이 떠오른다. 취준생이 아니라 사회 초년생의 일상을 보여 주고 있는 드라마임에도 말이다. 그리고 미생을 제대로 본 것도 지금 직장으로 이직했을 때의 일인데 말이다.


공부도 술도 열심이던 취준생 시절, 이제 갓 취업한 선배들이 잘 맞지도 않는 수트를 입고 술 한 잔 사주며 해 주던 소리가 있다. "걱정하지 마. 다 먹고살더라고. 전공을 못 살려서 그렇지!" 취준생에게 도움 하나 되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다. "에라이, 그럼 선배는 취준생 시절에 걱정 안 했냐!" 취업 성공담을 자랑할 상대가 필요했던 거면 안주라도 비싼 것 좀 시켜 주지. 물론 나도 조언을 구하는 후배들에게 같은 안주를 시켜 주고 같은 말을 한다. "걱정하지 마, 새꺄. 다 먹고살아." 사랑은 사랑이되 눈물겨운 내리사랑인 셈이다.


당시 열등감에 꽁꽁 휩싸여 괴로워했던 기억도 난다. 나는 무얼 잘하나. 어설프다. 무얼 갖고 있나. 어쭙잖다. 아무거나 할 수 있지만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잘난 철학과 졸업생. '듣자 하니 예전에는 졸업장 하나만 갖고도 대기업에 입사했다며? 이런 어려운 시대에 계속 도전하는 열정만 해도 나 좀 대단한 것 아냐?' 그때의 난 한 세대의 업적을 통째로 부정하고 나서야, 자소서만 족히 오십 번을 쓰며 구겨졌던 자존심을 겨우 되찾곤 했다. 못났다. 못났어.


그러고 보니 직장인이 되고 나서 가치관이 꽤 달라진 것 같다. 미생 매 화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 '주인공들의 삶, 꽤 낭만적이야. 그러나 그들처럼 살려고 애쓰고 싶지는 않아.' 지금도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히 그런 삶의 방식이 너무 힘들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은 아무리 치열하게 살아도 그들처럼 빛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도 있다. 장그래도 한석률도 안영이도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무언가를 이뤄냈다. 바닥보다 더 바닥 같은 곳으로 떨어져도 기어이 올라오거나, 호랑이 같은 상사들 앞에서 기죽지 않고 '현장이지 말입니다!'를 외치거나, 아니면 선배들도 기가 죽을 만큼 능숙하게 업무를 처리하거나.


나에겐 탁월한 지성도, 튀는 창의력과 열정도, 판을 뒤집을 기막힌 한 수도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많은 것들을 이뤄냈다. 친구들만큼이나 애틋한 동료들이 생기고 수위 아저씨가 내 얼굴을 기억한다. 미로 같던 회사 주변이 어느새 익숙해지고 지인에게 소개할 근사한 가게들도 생긴다. 지갑 여전히 얇지만 한 턱 낼 때 일초도 망설이지 않는 대인의 마음도 갖게 되었다. 선배 말처럼 먹고살다 보니 누가 잘났건 못났건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그냥 이렇게 살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열등감은 마치 제모하다 만 털 같아서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는 의식하기 힘들다. 영구적인 제거가 어렵다는 점도 비슷하다. 가끔 마음속에서 슬며시 올라오는 요놈이 열등감인 것 같다 싶으면 이제 주문을 외워 볼까 한다.


"그들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자. 내가 그들이 될 필요 없다. 그들의 삶을 따라 살지는 말고 나의 삶을 살자. 나의 삶이, 내가 살아온 자취가 곧 나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저 내가 되면 된다. 잘 가시게. 열등감에 절어 있던 어느 순간의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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