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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브로 Apr 23. 2022

고양이와 어린 왕자

어린 왕자

4냥꾼 캣브로, 쉰아홉 번째 이야기




몇 해 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취기와 달빛에 몽롱한 정신으로 겨우 집 근처까지 왔을 때, 어두운 골목 한 편에서 나를 응시하는 밝은 눈이 보였다. 저게 뭐지. 다가가 보니 주황빛의 통통한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녀석은 가만히 나를 쳐다보기만 하다가 이내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말을 했다.



“고양이 사진 좀 보여 줘.”


잠깐만, 너도 고양이잖아. 그런데 고양이와 대화를 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뭐라고?”

“고양이 사진 좀 보여 줘.”


느닷없이 등장한 고양이가 황당했다. 고양이가 말을 는 광경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난 말없이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너도 고양이잖아. 왜 고양이 사진이 필요하지?”

“부탁이야. 고양이 사진 좀 보여 줘.”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도 모르게 답을 했다. 그 순간 창작보다는 파괴에 능한 내 똥손이 찍은 사진들을 보여 줘 봤자 여지없이 이 조그만 녀석에게 비웃음을 살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 사진이 있기는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녀석이 내 다리에 제 앞발을 턱 올려놓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고양이 사진 좀 보여 줘.”



한쪽 무릎을 꿇고 녀석의 키에 나의 몸을 맞추었다. 사진을 보여 주기 위해 정신을 차려 외투 한쪽 주머니에서 제멋대로 엉켜 있는 이어폰과 함께 휴대폰을 꺼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일, 보여 줄 수 있는 건 다 보여 주자.


"좋아. 고양이 사진을 보여 줄게."



“안 돼! 이 고양이는 너무 뚱뚱한걸.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조그마한 곳이란 말이야. 더 작고 귀여운 고양이 친구가 필요해. 다른 사진을 보여 줘!”


나는 손을 바삐 움직이며 다른 사진을 찾았다. 그래, 이 사진이면 적당할 것 같아.



“이건 고양이가 아니라 아기 늑대잖아... 내가 필요한 건 귀여운 고양이 친구라구.”


이 녀석이 점점 짜증 나기 시작했다.


"잠시 기다려 줄래?"



“이건 물범이잖아... 물범은 내가 사는 곳에서 살 수가 없어.”


체념했다. 사진첩의 모든 사진을 보고 나면 이 녀석도 지쳐서 가겠지.



“다시 보여 줘. 이건 사막여우처럼 보이는걸. 난 고양이 친구가 필요해”


될 대로 되라지. 화가 난 나는 고양이가 숨어 있는 침대 사진을 보여 주고는 말했다.



“이건 침대야. 네가 원하는 고양이는 그 안에 있을 거야.”

“내가 찾던 고양이야! 이 고양이는 사료를 많이 먹을까?”

“왜? 그게 왜 중요해?”

“내가 사는 곳에는 사료가 많이 없거든.”

“충분할 거야. 사료보다는 물을 많이 마시는 녀석이거든.”

“고마워!”



녀석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 녀석이 도대체 사람과 어떻게 대화가 가능한 것인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끝까지 묻지 못했다. 무엇보다 고양이 사진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그러니까 이게 벌써 몇 해 전의 일이다. 아직도 꿈인지 진짜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다. 여러분도 항상 휴대폰에 고양이 사진 한두 개쯤은 담아 두었으면 한다. 언제 어디서 수수께끼 같은 주황빛 고양이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니까. 혹시 이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 사진을 끈질기게 요구해도 짜증 내는 일 없이 그저 작은 친절을 베풀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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