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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샌코 Dec 07. 2022

아버지들의 다이너스티

몇 달 전에 이십 년된 아버지의 차가 폐차됐다. 여름 폭우로 물을 오래 맞더니 그대로 퍼진 모양이었다. 전해 듣기로는 엔진이 쌕쌕거리다가 이내 시동이 꺼지고 움직이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 불러서 고쳐볼까 하다가 기왕에 그 길로 견인차를 불러 폐차시켰다고 했다.


엄마는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예전부터 고장이 심각해서 크게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오토미션이 깨졌다느니 엔진에 쇳가루가 돌았다느니 배선 문제로 다이오드가 터졌다느니. 하다못해 조수석 손잡이까지 말썽을 부렸다. 손잡이를 아무리 당겨도 삐걱거릴 뿐 문이 열리지 않다가 나중엔 아버지만 아는 각도와 힘을 들여야만 문이 열렸다. 과연 천연의 보안문(保安門)이었다. 그뿐인가. 오디오 볼륨 단추가 떨어지고 없어져서 음량을 줄이거나 키우지 못했고, 다시방 서랍도 어디가 부러졌는지 잘 닫히지 않아서 잡다한 서류뭉치를 가득 쌓은 쓰레기통 된지 오래였다. 에어컨 바람은 미지근 했는데 가스를 넣어도 필터를 갈아도 마찬가지였어서 아버지의 수십년 단골 카센터 사장님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다.


“올핸, 폐차 해야지…”


아버지는 말버릇처럼 폐차, 폐차를 외웠지만 차는 우리 가족 이십년사(史)를 묵묵히 지켜왔고 그곳에 깃든 정을 쉽게 떼어내지 못했으리라. 하여튼 고철값 정도만 남은 이 고물차는 제 몸값을 훌쩍 넘는 비싼 수리비를 계속 감당했다. 엔진도 갈아 엎고 서브미션도 갈고 바퀴도 갈고 범퍼도 갈고 엔진오일, 브레이크 패드, 바떼리 따위 소모품도 제때마다 챙겨 먹었다. 그러면서 서울 전역을 용케도 기어다녔다.


2002년식 현대 다이너스티. 중대형 세단인데도 칙칙하거나 둔해보이지 않았다. 까만 턱시도를 잘 차려입은 말쑥하고 예의바른 신사 같았다. 앞편 보닛은 동그랗게 치켜 뜬 전조등의 모양을 따라 육감적인 굴곡을 드러냈다. 그러나 뒷편 트렁크는 무른 무쇠를 서슬로 대번 도려낸 듯 딱떨어지는 각을 내어 무뚝뚝한 긴장감을 줬다. 흡사 엉덩이에 힘을 탁 주고 눈을 부릅 뜬 채 바짝 긴장하고 있는 초짜배기 샌님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뜻 직선과 곡선의 서로 다른 테마가 불협화음을 낸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은빛 크롬 도금의 가니쉬가 차량 한바퀴를 삥 둘러서 그 부조화를 기가 막히게 화해시켰다. 지금은 유치하고 촌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나는 분명 그곳에서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다이너스티만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나온다고 믿었다.


나는 열여섯 살에 이 차를 처음 만났다. 불혹을 훌쩍 넘은 나이에 사업을 막 시작한 아버지를 위해서 할아버지가 주신 선물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다음해에 돌아가셨으니까 우리 가족에 남겨주신 마지막 유산이기도 했다.


명절 제사가 찾아오면 집안의 장남인 큰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종가로 모셨다. 보통 큰아버지의 빛바랜 남색 엘란트라를 타고 다니셨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그러니까 차를 출고했던 그 해 만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이너스티가 할아버지를 모셨다.


할아버지는 새차의 기능 이것저것을 살피셨다. 클러치를 밟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변속하는 부드러운 엔진음을 감상하시다가 터치식 전자지도가 신기한 듯 눌러보시기도 하셨다. 대형 세단이 주는 고요한 주행감에 외마디로 감탄하시면서 크게 웃으셨다가 금세 모두에 익숙한 적막으로 돌아와서 입술을 굳게 다무셨다. 할아버지는 가래가 들끓어서 자주 쿨럭거리셨고 침을 게워내셨다. 건강 상 술을 못 드신지 꽤 됐는데도 살결에서 알코올 냄새가 났다. 고목 껍질 같은 손으로 보조손잡이를 꼭 잡은채 한번의 뒤척임도 없으셨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 저런 생각이 들면 ‘묏자리는 가봤냐’, ‘제사상 물가가 많이 올랐다’, ‘경수네도 아프다더라’ 하는 시시한 말씀만 하셨고 아버지는 ‘예예…’ 하면서 웅얼거리기만 했다. 창밖 풍경은 뒤켠으로 쉴 새 없이 쌓이면서 모양을 바꿔나갔다. 그 변화의 끝이 익숙한 동네의 그림으로 완성될 때쯤 할아버지가 툭 던지듯이 말씀하셨다.


“창수, 사업도 대성할 거야. 아마…”


아버지는,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 고맙습니다. 아부지.”


부자는 서로 멋쩍게 웃었다. 할아버지는 무릎을 눌러 짚고선 얼른 밖으로 내리셨다. 아버지는 평소보다 핸들을 휘휘, 더 과격하게 돌려서 주차를 마쳤다. 단 한 번도 나누지 않은 부자 간 대화가 서로 어색했을 것이다. 또 이제와서 차남의 성공을 기원해주기도, 밝게 화답하기도 부끄럽고 민망하셨을 것이다. 아니면 별 거 아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진작에 해줬다면 좋았을 것을 후회스러우셨을 것이다. 그 짧은 대화란, 이제와 그 부자 관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나로선 참으로 참기힘든 어색한 격려와 화답이었던 것이다. 다이너스티도 그 대화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까?


할아버지는 말년에 모든 사업을 정리하시고 안양에 땅을 얼마 사서 건물을 짓고 월세를 받고 슈퍼를 차리셨다. 생계를 위한 일은 아니었고 은퇴 후 소소한 일거리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그 슈퍼 안쪽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서 할아버지와 주먹 내기를 하고 사탕이나 초콜렛 같은 달달한 걸 많이 얻어먹었던 기억이 난다. 주먹 내기란 서로 주먹을 바닥에 내려 놓고 누가 먼저 상대방 주먹을 내리치고 또 잘 피하냐 하는 간단한 놀이였다. 할아버지는 이 놀이를 아주 즐거워하셨다. 특히 내가 번번이 질때마다 바짝 약이 올라서 할아버지를 이기려고 발악할 때면 함박 웃음으로 흡족해 하셨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내가 시간을 축내고 있으면 아버지는 그것을 핑계로 멀찍이 구석에 앉아서 새할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잠시 머물다 갈 뿐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슈퍼 이름은 ‘대성슈퍼’ 였다. 동네 슈퍼 이름 치고는 되게 거창하다고 생각됐지만 ‘결국 이루고 말리라’ 하는 대기만성의 의미라면 또 소박한 이름 같기도 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작은 봉제공장에서 오랫동안 일 하다가 IMF사태로 사정이 어려운 회사를 싸게 인수하는 방식으로 사장이 됐다.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할 때 공장 이름을 뭘로 할지 몇 날 며칠을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결국 ‘대성실업’이 됐다. 친가의 많은 유산을 제대로 상속 받지 못하고 차 한 대로 끝내는가 속사정이 깊었던 엄마는 못마땅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차남으로서 할아버지의 역사를 따랐던 것이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후로 해서 그때의 복잡한 사정과 심정을 내게 자주 고백했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큰 도움을 주시지 않으셨고 그 유산은 모두 장남인 큰집에 몰아주셨기 때문이다. 엄마는 어떨 땐 울분에 차서 또 어떨 땐 회한에 차서, 그러다가 십여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고 난 뒤로는 건강이 최고라면서 시댁에 사무친 마음의 응어리를 하나 하나 풀어나갈 수 있었다. 내가 결혼할 때 쯤에 엄마는 유산 문제로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던 큰집과 마침내 화해하고 오랜만에 한가족이 모여서 회포를 풀기도 했었다. 엄마는 누구 탓도 할 수 없는 그 설움을 혼자서 삭히다가 내 결혼을 계기로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추억하며 그 모두를 완전히 희석하셨으리라.


할아버지는 결혼을 두 번 하셨다. 당시 표현으로는 본처를 버리고 첩을 들이셨다. 본처에게선 큰아버지와 아버지 둘을 낳았다. 중간에 다른 형제가 있어서 아버지는 한참 막내였는데 어릴 때 모두 죽고 둘만 남았다고 했다. 새할머니는 아주 부잣집 딸이었는데 남편을 여의고 불쌍한 처지로 살다가 할아버지와 눈이 맞아서 새 살림을 차린 거라고 들었다. 그래서 큰아버지는 장남으로서 계속 본가에 머물며 새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으나 차남인 나의 아버지는 버려진 처, 그러니까 나의 친할머니를 모시고 살며 아비를 잊은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새 장가를 들면서 유일한 아들은 큰아버지 하나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부잣집 딸에 장가를 들고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데 본처의 가족들은 걸림돌이 됐을 것이었다. 본처 가족을 먹여 살린다고 이런 저런 손을 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를 이을 장남 하나면 족했을 것이며 나머지는 당장 정을 끊고 남으로 여겨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와 친할머니는 할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후로 평생 그 가족들의 주변에서 계속 맴돌았다.


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절 지원을 받지 못했다. 여기 저기 공장 일을 전전했다가 스물 대여섯살엔 이라크에 나가서 토목 일을 좀 했다. 그런데 대학교를 나왔다고 거짓말 한 이력서가 들통나 회사에서 쫓겨나고 다시 가리봉동 봉제 공장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을 한 뒤로 거기에 자리 잡아서 마침내 사업까지 일으켰다. 내가 관찰한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하고 다행스럽게 여겼던 것 같았다. 큰아버지인 형님과 배다른 누이들에게 늘 깍듯했고 먼저 안부 전화 해서 시간이 지나 흐릿해진 가족의 울타리를 홀로 지키고 서 계셨다.


할아버지는 지으신 건물에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아 같이 살게했다. 그 대상은 큰아버지와 고모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우리 가족은 초대받지 못했다. 출가외인의 정서였던 것일까. 본처 가족은 장남 하나로 족하니 너희는 알아서 살라는 무언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야박한 대접에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한편으로 아주, 처절했다.


하지만 내 기억이 겨우 닿는 때부터, 할아버지가 조금씩 달라지셨다고 했다. 정확히 엄마가 나를 낳고나서부터 였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무뚝뚝한 할아버지의 성격을 사르르 녹이는 애교와 아양을 제법 부릴 수 있어서 할아버지가 아주 좋아하셨다고 했다. 하루는 엄마를 불러서 ‘저 놈은 끈질기고 호기로운 데가 있어서 윤씨 가문을 빛낼 녀석’이라고 일러주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눈빛에서 당신의 지나온 역사를 돌아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이를 먹을 수록 엄마를 통해 늘 미안함을 얘기하셨다고 했다. 우악살스러운 본성 뒤로 엄마만 조용히 불러내 고급 화장품을 몰래 선물해주기도 하시고 눈가가 촉촉해져서 엄마의 손을 오랫동안 붙잡고 쓰다듬어 주기도 하셨다는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걸로 상처 받았을 너와 네 가족들에게 사과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심지어 그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것을 우려했던 새할머니가 오히려 우리를 더 끔찍하게 여기셨다. 남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아 하는 할아버지 성격에 본처와 차남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모질게 대했음을, 할머니는 그 옆에서 더 생생하게 목격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큰집과 아무 상의 없이 큰돈을 들여 우리에게 다이너스티를 선물해 주신 것 아니었을까. 나는 계속 커가면서, 또 할아버지는 죽음을 직감하면서. 할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후회를, 나는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우리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상대성을 두고, 이 차 안에서 아버지들 밀도를 조금씩 좁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이너스티 안에서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격려했다. 그것은 후회이기도 했고 사과이기도 했고 또 아들에 대한 인정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 곁에 끝까지 맴돌았던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 도움 없이 내가 성공할 것임을 끝까지 지켜보라는, 아버지의 아버지를 향한 복수이기도 했고 욕망이기도 했고 그토록 바랐던 인정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연락을 받고 영안실로 가는 길, 아버지는 다이너스티 안에서 펑펑 우셨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펑펑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저 깊은 곳에서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뜨거운 수증기같은 울음이었다. 그것은 상실감에서 오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증오와 회한과 번뇌와 고독과 연민이 제각각 섞여있었다. 울음이 차오르면 증오로 비워냈고, 그 빈 공간을 다시 울음으로 채웠다. 우는지 분한 것인지 그 괴이한 울음 소리 곁에서 다이너스티는 휑- 소릴 내며 따스한 히터 바람만 송풍할 뿐이었다. 다이너스티도 그 모두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후로 다이너스티는 우리 가족을 싣고 서울 이곳저곳을 누볐다.


고등학생 땐 엄마가 차를 몰고 마포대교를 건너 학교를 데려다 줬는데 다리를 건널 적에 늘 Pretty Maids의 Please don’t leave me를 들으며 야경을 만끽했던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한번은 고등어 상자를 트렁크에 싣고 깜빡했다가 푹 썩어버리는 바람에 1년 내내 썩은내가 가시지 않아 고생하기도 했다. 대학 면접에도 다이너스티를 타고 가서 합격했고 또 그곳에서 졸업했다. 다이너스티는 창원에 있었던 훈련소까지 내려왔었고 전역 후에는 기꺼이 내 연습용 차량이 되어 운전 면허를 딸 수 있게 도와줬다. 지금 아내와 연애할 때도 다이너스티는 우리와 동행했다. 물론 결혼식장에도 우리 가족을 태우고 나를 축복해줬을 것이다. 그 친구 말년에는 아버지가 가끔 내 아들, 손자를 태우고 어린이집을 왔다갔다 했다. 아내는 그 고물차가 갑자기 어떤 사고를 일으킬 지 몰라서 노심초사했지만 아들은 다이너스티를 ‘할부지차’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다이너스티는 작은 우리 가족의 역사를 묵묵하게 지켜왔다.


이 친구한테 인사 한번 제대로 못하고 폐차가 됐다. 수 년 전부터 폐차될 것을 예감하고 이 차를 배경으로 가족 사진을 찍고 싶다고 여러번 얘기했지만 공상이 돼 버렸다. 그래서 나는 글로나마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나와 아들을 잇는 우리의 다이너스티를 소소하게 추억하고 싶었다.


다이너스티, 할아버지가 만든 작은 시대가 이제야 저물었다고.


가장 최근 영상에 남아 있는 다이너스티의 마지막 주행 기록. 안녕, 다이너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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