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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앞니를 좋아하는 사람의 시대

by 순두비


고양이의 귀여운 정수리, 오똑하지도 않은 코를 타고 흘러내려가보면 그 시선 끝에는 잘 보이지 않는 앞니가 쌀알처럼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의 있으나 마나 한 앞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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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이유로 사람들은 고양이의 앞니를 좋아한다는 글을 보게 된다. 있으나 마나. 그런 것에 대한 시대의 애착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고, 존재의 필연적 소멸에 대해서 온생을 통해 거부 의사를 내비친다. 그런데도 있으나 마나 한 작은 걸 좋아하는 시대가 왔다. 사라지고 싶지 않은 필연적 소멸의 존재들은 작은 것에 기댄다. 과거에도 조개목걸이 같은 것이 발견되었던 것 보면 하루 이틀의 이야긴 아닌 것 같다.


인류의 역사에 한 점을 남기고 싶냐? 이렇게 묻는다면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다수가 그렇진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하루들, 그 하루가 모여서 고양이의 앞니가 되는 것이다. 있으나, 마나, 했던 날들이 모여 너무나도 귀여운 모양새의 흔적으로 남고, 그 날들을 꺼내어보는 것이 인간들의 욕심없는 보통의 삶이다.


재미있게도, 지나치게 더웠던 일생의 아이러니는 뜻밖의 것에서 만나게 된다. 기능주의적으로 최대한의 출력을 뿜어내다가, 저 너머의 존재를 서로 인식할 수만 있다면 깊은 사랑과 끝없는 애정을 담아낼 수 있는 틈. 고양이의 송곳니 사이에 담긴 쌀알의 궤는 숨 쉬는 모든 존재가 남기는 감정의 흔적, 불필요한 것들이 남겨놓은 귀여운 존재 이유가 담기고 만다.


이런 멋진 생각은 나의 보물, 나의 다리를 성한 날 없이 만들어주는 유자가 알려주었다. 나는, 피할 겨를 없이 앉아서 고뇌에 빠졌다가 그대로 물렸다. 유자는 온갖 생각을 뿜으며 온 저녁을 보낸 내 앞에서 꽤 오래 기다리다가 화를 냈다. 유자는 장난감을 힘껏 물었지만, 앞니의 쌀알들이 비협조적으로 구는 바람에 장난감을 주르륵 뱉어내고 말았다. 유자가 억지로 종료한 나의 힘들었던 하루는 이렇게 마무리 된다.

"그녀는 고양이의 앞니를 좋아했다. 거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가 숨어있다고 믿으면서."


조금 전까지 갑자기 울컥한 저녁 시간을 떠올리며 시간을 무한히 가진 사람처럼 펑펑 썼다. 나는 왜 화가 날 때면 나를 '너'라고 부르는지, 나는 왜 그럼에도 '정윤이가 울지 않길' 바라며 내게 편지를 자주 쓰는지. 이번 생에 맡게 된 정윤이란 삶을 알아보느라 고민했다. 부조리와 화해하는 카뮈가 되어 반복된 일상을 다시 굴려 올리며 프로메테우스가 되었다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해보다가. 고통 속에서도 의미는 있다며 빅터 프랭클이 되었었다.


내 안의 방을 찾아 문을 열고 또 열고, 또 열고 닫고, 열고 닫고를 계속하다 문장을 쓸 때마다 방의 여백이 늘어나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해방감을 느끼다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 노래를 마구 흥얼거리며 고양이의 대여섯개 밖에 되지 않는 귀하고도 소중한 앞니라는 틈에 나를 놓아주었다.


비로소 내가 나로 살아도 괜찮다는 허락은, 고작 대여섯개의 고양이 앞니, 그만큼의 틈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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