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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에스프레소

by 순두비

에스프레소에 착즙 오렌지 주스를 얹으면 색깔이 섞이지 않는다. 상큼하고 단 맛, 쓴 맛이 차례로 목을 따라 넘어간다. 밥을 먹으며 오렌지 에스프레소의 사진을 지나가듯 그에게 보여줬었다. 남자친구가 이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식사를 마치고 들린 카페에서 이 음료를 주문했다. 나는 평소에 마시던 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얼그레이 케익도 추가했다. 그와 만날 땐, 내가 마시고 싶은 것 하나와 늘 마시던 것 하나를 주문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그는 무던한 사람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이 나를 아낀다. 오늘의 선택, 오렌지 에스프레소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도 좋았고, 아는 맛인 얼그레이케익도 맛있었다. 안정된 걸 추구하면서 살아가지만, 새로운 걸 고민할 때면 나를 무조건 지지해주는 사람과 살고 있다. 데이트를 하며, 그와 함께 살아가며 내가 더욱 무계획형 인간이 되어가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가끔 나의 새로운 선택이 처참하게 느껴져도 그에게 나눠주면 된다. 맛이 별로라고 하면서도 그는 입에 다 넣은 뒤 우물거린다. 내 선택이 최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엔 다른 걸 먹어보면 되지 않겠냐며 꿀꺽 삼킨다. 내게는 모서리에 다다른 것 같은 순간일 지라도,


그는 옆을,

쳐다보면서,

옆으로 향해가면서,

한사코 내 옆에 서있으면서,

더듬어 나아가다 보면 동그라미엔 끝이 없다고 그런다.


얇게 썬 오렌지 위에 설탕을 바르고, 토치로 구운 토핑이 얹어진 오렌지 에스프레소. 까만 아메리카노가 다 빠져나가고 허여멀겋게 남은 각진 얼음. 주황색 둥근 오렌지 한 장이 막아선 상큼한 에스프레소가 좀 남아있다. 우리 사이엔 둥근 오렌지가 있다.


오렌지를 뜯어먹은 그가 맛이 없다고 한다. 먹어보니 맛있는 것도 같아서 내가 먹겠다고 했는데, 배가 불러 내려놓았다. 카페를 떠나기 전에 그가 또 먹고 있다.

'커피는 맛있었고, 이 오렌지만큼은 내 입에 안 맞는 것 같아... 다음엔 너티 커피를 시켜봐야겠어.'

우리에겐 다음이 있다.


한 번의 선택으로 모든 게 끝날 수 있을까? 핵폭발이 아니고서야. 그러니까 선택을 계속해나가다보면, 그건 선택이 아니라 고민중인 보기가 되는 것이고...

인생은 선택과 결정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보기를 나열하는 것 같은 거라고... 그러면 인생은 한 바퀴를 돌아도 그 둘레만큼은 나아가고 있는 거라고... 따라오는 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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