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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Aug 21. 2022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망설일 건가요?(상)

심리상담을 망설이는 당신에게

시작부터 여담이지만, 같은 제목으로 써놓은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은 폐기하기로 하고 다시 쓰는 글이다. 샤워를 하는 내내 상담에 다녀온 걸 어떻게 적어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 여러 제목을 고민해 보았는데 이것만큼 더 어울리는 것이 없기도 해서. 폐기된 그 글은 요란한 밤을 보내고 큰 가위로 손목을 그었을 때의 이야기를 썼다. 나를 사랑하는 무뚝뚝한 오빠는 '네가 없으면 조금 슬플 것 같다.'라며 다신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해가 밝았을 때, 난 친구에게서 그만 살고 싶어 투신했다는 다른 친구의 이야길 듣게 되었다. 언젠가 깨어나면 읽어 주길 바라며 글을 썼다. 조금 더 힘내서 살아보자며 누구를 위해 쓴 지 모를 독백을 썼다.


상담 전날 밤부터 숨을 쉬기가 힘들어서 잠을 설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모더나를 맞았던 날처럼 자꾸 심장이 쾅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환상에 시달렸다. 내가 잠들고 나서도 몸은 혼자 시름을 한 것인지 일어나고 나서도 여파가 남아있었다. 결국 오전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동네 강아지들의 산책 코스에 앉아 오빠와 별 얘기 아닌 걸로 토론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점심을 대충 먹고 출발했다. 회사를 관두고는 나다닐 일이 별로 없었던 나는 아주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기 위해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정말 오랜만이란 생각을 함과 동시에 밀려오는 아찔한 가시가 온몸에 퍼지고 숨이 콱 막혔다. 또 공황발작의 전조였다. 그래도 오빠가 있어 형체도 없는 그것에 지지 않을 수 있었다. 오빤 계속 '이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어라.'라며 나를 돋우어주었다. 꽤 먼 길이었는데도 흔쾌히 나서 준 오빠 덕에 그곳까지 갈 수 있었다. 그렇게만 멀게 느껴지던 가톨릭대학교의 교정은 먼저 상담을 다녀본 오빠 말대로 고즈넉하니 좋았다. 새로 자란 잎과 오래도록 햇빛에 녹아든 짙은 이파리가 섞여 붉은 벽돌의 건물과 묘하게 안정감을 주는 신비스러운 곳이었다. 사람 없는 곳에만 가면 숨이 턱 막히는 나에게 이런 감정을 줄 수 있다니. 이름만큼이나 그곳이 신과 가까운 학교여서였는지 아님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려 한 건지 묘한 감정이 들었다.




시간이 되고 건물에 들어가자, 때마침 물을 뜨기 위해 나온 교수님과 마주쳤다. 그대로 교수님의 사무실로 들어가 앉아 교수님께서 물을 뜨는 동안 혼자 책장에 꽂힌 책들의 표지를 보았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읽다가 덮어버린 책이 보였다.


이윽고 교수님께서 들어오시곤 상담을 받게 된 계기를 먼저 물어보셨다.

"상담을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어려운 결정 하셨네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는지..."

"그건 모더나를 맞고서 겪은 경험 때문인데요. 저는 살면서 늘 0번의 선택지로 '죽음'을 숨겨두었는데, 막상 주사를 맞고 정신이 아득해질 때 너무나 살고 싶었던 나를 발견한 거예요. 어떤 죽음이든 받아들일 준비는 안 되어있었던 것 같아요." 하자 교수님께선 '죽고 싶었던 때와 죽음을 인지를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라며 '모더나가 큰 역할을 해주었네요.'라고 하셨다.


"혼자서 명상도 해보고 책도 읽으며 문제가 무엇인지 탐색했던 날들이 있었는데,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뭔가 안 괜찮은 것 같아서 가이드 명상을 들으면서, '너 뭐가 안 괜찮은 거야?', '말해봐.' 하고 운을 떼도 도무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데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저랑은 대화를 도무지 안 하려 하니까."

"그렇죠. 문제가 뭔지 알면 해결해 보려고 할 텐데, 문제도 모르는데 답부터 찾으려 하니 그럴 수 있어요. 큰마음먹었어요. 정말."


다음은 상담 전에 작성해서 보내드렸던 인생 이야기를 보며 질문이 이어졌다.

"Life story를 쓰는 게 어땠나요? 쓸만했나요?"

그 질문을 듣자, 교수님께서 주문하셨던 life story를 쓸 때 느꼈던 나의 막막함에 대해 토로했다.

"어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저는 저의 이야길 잘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쓰다 보니 막히기도 하고 꽤 힘들었어요."

"그럼요. 어제 일만으로도 서너 페이지는 거뜬히 쓸 수 있는데, 이미 적지 않게 살아온 우리가 인생 이야기를 할 때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죠. 아무래도 할 이야기가 많다 보니. 그래서 쓰고 나니 어떻던가요?"

"제가 불쌍하던데요. 비슷한 시간들을 보내며 많이 지쳐있었고, 애쓰면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맞아요. 많이 노력했을 텐데. 사람이 비슷한 루틴으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접근법이 달라지질 않으니 많은 게 달라지긴 힘들죠. 이 글을 쓰면서 어떤 걸 중점적으로 쓴 것 같나요?"


글을 쓰면서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을 물어보셔서 이때도 당황했다. 나는 마치 면접을 보는 사람처럼 이런 이야길 해야지, 하고 생각해간 것들이 있었는데 교수님의 질문은 내 예상과는 계속 달랐다.

"아마... 외로움일 것 같은데요. 사람들과의 관계...? 저는 대학교를 입학하고선 영어로만 대화를 하고 발표를 해야 하는 학과에서 입을 닫고 표현을 하지 못하면서 살았거든요. 그중 처음 친해졌던 친구들과도 갑자기 멀어졌고."

"그 많고 많은 이야길 할 수 있는데 life story의 시작점이 20대였어요. 대학교를 진학할 무렵. 그럼 고등학생 땐 어떤 사람이었나요?"

"사랑을 많이 받았단 기억뿐이에요. 특히 선생님들께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친구들과 놀다가도 선생님들께서 많이 찾으시니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요. 간혹 친구들과 갈등이 있어도 사랑하고 지지해주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것도 괜찮을 만큼 가족들의 사랑도 컸고요."

"이야길 들어보니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것이 마치 천국과 지옥 같네요. 사람이 차차 변해가는 환경에는 적응할 수 있지만 이렇게 급격하게 변하면 누구라도 견디기가 힘드니까요."

"그래도 외교관이 될 수 있다 하니까 견뎠던 것 같아요. 이 정도는 해야, 이 학과를 나와야 외교관이 될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정 씨는 공감 능력이 아주 특출 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빨리 알아채거든요? 그런데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계기가 누명 쓴 '유학생을 도와주고 싶어서'잖아요? 그 순간에도 유학생의 억울함에 공감을 한 것일 거예요. "


 그간 설명되지 않던 것들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해외에 가면 내가 그곳의 외국인이 되는데, 소수의 이방인이자 또 타자로서 소외감과 공포심을 느끼면서도 외교관이 되고 싶어한 것이 어딘가 이상하단 생각을 많이 해왔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것이 실은 아니었단 생각은 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평생의 꿈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었다니 놀람과 동시에 그저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라 부르던 희미한 마음도 깨끗하게 털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학교를 그만 둘 생각은 못 했나요?"

"한 번은 1학년 1학기 때,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서 반수 해도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반수 해서 그 학교보다 더 좋은 학교 갈 수 있을까?'. 그러는데, 또 더 좋은 학교를 못 갈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해서, 참고 다녔어요. 그다음부턴 그냥 2학년이니까, 3학년이니까, 더 부담스러워서 그런 생각을 못 했죠."

"왜 거기보다 더 좋은 학교를 가야 하죠? 못 가면 어때서?"

"부모님께서 제가 대학을 붙었을 때 기뻐하셨으니까요."

"사실 정 씨 마음은 다 정해졌고 어머니께는 permission만 구한 건데, 엄마가 안된다고 하니까 정 씨는 본인의 욕망을 억압한 거네요."

"맞아요. 허락을 구한 거였는데. 그런데 오빠가 고등학생 때 다니던 학교를 옮기고 엄마와 갈등을 겪는 걸 보면서 엄마 말이 맞을 거라 생각한 것도 있었어요. 아무래도 더 오래 살아보셨으니까."


"왜 다시 이야기해 볼 생각은 못 했을까요?"

"아마 엄마의 그런 반응이 처음이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학창 시절 내내 '괜찮은 아이', 혼자 놔둬도 잘 자라는 아이를 담당했거든요. 그때 오빠는 엄마랑 자주 갈등을 겪다 보니, 저는 엄마 속을 썩이지 않아야겠단 생각을 했었어요. 그냥 공부 하고 있으면 별말씀 안 하시다 보니, 제가 하고 싶다는 것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때처럼 안된다고 얘길 한 것도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더 이야기하지 못했던 거죠."

"이건, 상담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속된 말인데 '먹혔다.'라고 해요. 감정을 먹힌 삶. 정 씨는 부모님의 욕망과 자기의 욕망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해요. 자기의 욕망은 억압하면서 부모님의 감정을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다 보니 부모님의 기대대로 행동했을 거예요. 그게 오래 지나다 보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거죠.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어떤 지도 모르고. 하혈하고 주사를 맞고 유독 심하게 몸이 반응한 것도 그렇고 몸은 계속 살려달라 외치는 거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잘 세워놓으면 남의 이야길 들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닌 상태인데 타인의 기대에만 맞춰서 살고 있었던 거죠. 남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처음부터 말이 안 되죠. 본인은 지금 '못한다'라는 걸 알아야 해. 노력해서 해볼게가 아니라 못한다, 할 수 없다."


그러자 아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순간도 생각이 났다.

"한 번은요. 아빠가 저한테, '부산으로 다시 내려오면 실패한 거다.'라고 하셨던 것도 기억이 나요."

"그때 아마 스스로는 이미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할 수 없다는 것을. 이곳에서의 학업이 힘들다는 것을.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을지."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들은 말이었다. 아빠는 내게 서울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길 바라고 하신 말씀이셨을 것이다. 사람은 한양으로 가야한단 말이 시덥잖게 들리던 시대를 사셨으니, 그 마음도 이해한다, 지금에서는. 하지만 그때 난 기숙사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아빠의 말을 듣곤, 어떻게든 살아봐야지, 잘해봐야지 생각하며 씁쓸한 기분과 함께 전화를 끊은 기억이 난다. 그 순간에도 못한단 생각은 하지 못한 채로 그랬다. 


그날을 생각하며 저녁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머리를 타고 등줄기까지 흘러내리도록 한참을 내버려 두었다. 실은 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을 거란 교수님 말씀이 생각나 소리를 내어 울었다.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이렇게 잘 알아준 사람이 있었던가. 울어도, 화가 나도, 행복해도, 모두 남의 것으로부터 가져온 것 같아 어딘가 낯설던 종래의 감정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만에 허했던 속 어딘가 뜨거워져 이것이 진짜 내 감정이구나 싶어 눈물마저 고마웠다. 조금 더 울잔 생각에 샤워기를 틀어놓고 얼굴을 감싸 안고 울었다. 울고 싶은 밤을 얼마나 그냥 흘려보냈던가. 다 놓아버리고 싶은 날들을 얼마나 애써 붙잡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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