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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Aug 20. 2022

나는 언제 자랄까

엄마의 여가

부모님께서 외출하신 저녁, 혼자 밥을 차려먹을까 하다가 날씨를 핑계로 라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각종 냄비가 모여있는 찬장의 문을 열었는데 있어야 할 곳에 냄비는 없었다. 냄비 하나 찾으려고 엄마한테 전화하는 것도 웃기고. 그렇다고 전화를 안 하려니 도무지 찾을 순 없고. 이 나이 먹고 라면 하나 끓여먹지 못하게 되는 건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 피식하는 웃음소리는 김이 빠지는 소리였다. 나는 편수 냄비가 어디로 간 줄 모른다. 맛있는 반찬은 고사하고 밥 한 끼를 챙겨 먹는 것도 귀찮아서 대충 한 끼를 먹는다. 그러면 내 끼니가 점잖아지는 것은 오로지 엄마가 있을 때만, 인 것이다! 나는 그런 내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어 입을 닫았다. 이 상황에서 웃을 거리라곤 없다. 나는 너무나 당연한 나의 식사를 엄마에게 맡겨 두고는 이토록 모자라게 살아온 것이 수치스럽다.


오늘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는 내게, 내가 너무 대단한 사람 같아 자기가 작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쥐뿔도 없고 식사를 챙겨 먹는 부지런함도 없고, 엄마 혼자서만 이 커다란 부엌을 다 알게 놔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근본이 없다. 대단한 사람일 리가 없다. 그저 말을 잘하고, 내가 아는 이것저것을 섞어 말하길 좋아하는 수다꾼 말고 무엇이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없다. 대단한 그 무엇은 나와 거리가 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는 당신이 좋아하는 걸 아직 모른다. 찾을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런 나는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다.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자 30년 지기 엄마의 친구다. 엄마는 내가 잘 먹지 못하고, 최근엔 살까지 많이 빠져 걱정이라 하신다. 출근 전 살뜰히 말아놓고 간 김밥을 다 먹으면 7살 어린아이를 보듯 잘 먹어서 다행이라 하신다. 나는 그래서 성숙한 사람조차 지 못한다.


엄마는 엄마가 사랑하는 것들을 부엌에 숨겨놓는다. 좋아하는 그림이 담긴 접시, 설거지를 하며 듣는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나오는 휴대폰, 가족들에게 먹일 양식, 어떤 고양이든 언제라도 챙길 수 있도록 챙겨둔 사료 소분 봉투. 나는 엄마가 없는 부엌에서야 엄마의 삶을 더듬어 본다. 엄마가 사랑해야 할 엄마의 여가가 엄마의 생애로부터 멀어질 때까지 나는 뭘 했을까. 아무 냄비에다 끓여먹는 라면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모를 헛헛한 저녁이다.  한끼를 놓치고, 또 이만한 사람에 불과함을 느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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