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서 외출하신 저녁, 혼자 밥을 차려먹을까 하다가 날씨를 핑계로 라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각종 냄비가 모여있는 찬장의 문을 열었는데 있어야 할 곳에 냄비는 없었다. 냄비 하나 찾으려고 엄마한테 전화하는 것도 웃기고. 그렇다고 전화를 안 하려니 도무지 찾을 순 없고. 이 나이 먹고 라면 하나 끓여먹지 못하게 되는 건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 피식하는 웃음소리는 김이 빠지는 소리였다. 나는 편수 냄비가 어디로 간 줄 모른다. 맛있는 반찬은 고사하고 밥 한 끼를 챙겨 먹는 것도 귀찮아서 대충 한 끼를 먹는다. 그러면 내 끼니가 점잖아지는 것은 오로지 엄마가 있을 때만, 인 것이다! 나는 그런 내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어 입을 닫았다. 이 상황에서 웃을 거리라곤 없다. 나는 너무나 당연한 나의 식사를 엄마에게 맡겨 두고는 이토록 모자라게 살아온 것이 수치스럽다.
오늘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는 내게, 내가 너무 대단한 사람 같아 자기가 작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쥐뿔도 없고 식사를 챙겨 먹는 부지런함도 없고, 엄마 혼자서만 이 커다란 부엌을 다 알게 놔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근본이 없다. 대단한 사람일 리가 없다. 그저 말을 잘하고, 내가 아는 이것저것을 섞어 말하길 좋아하는 수다꾼 말고 무엇이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없다. 대단한 그 무엇은 나와 거리가 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는 당신이 좋아하는 걸 아직 모른다. 찾을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런 나는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다.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자 30년 지기 엄마의 친구다. 엄마는 내가 잘 먹지 못하고, 최근엔 살까지 많이 빠져 걱정이라 하신다. 출근 전 살뜰히 말아놓고 간 김밥을 다 먹으면 7살 어린아이를 보듯 잘 먹어서 다행이라 하신다. 나는 그래서 성숙한 사람조차 되지 못한다.
엄마는 엄마가 사랑하는 것들을 부엌에 숨겨놓는다. 좋아하는 그림이 담긴 접시, 설거지를 하며 듣는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나오는 휴대폰, 가족들에게 먹일 양식, 어떤 고양이든 언제라도 챙길 수 있도록 챙겨둔 사료 소분 봉투. 나는 엄마가 없는 부엌에서야 엄마의 삶을 더듬어 본다. 엄마가 사랑해야 할 엄마의 여가가 엄마의 생애로부터 멀어질 때까지 나는 뭘 했을까. 아무 냄비에다 끓여먹는 라면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모를 헛헛한 저녁이다. 또 한끼를 놓치고, 또 이만한 사람에 불과함을 느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