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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Aug 14. 2022

존경하는 상담 교수님

고(告), 2021년 10월 15일

평소 글을 쓰는 것을 취미로 하고 있고, 한때는 업으로도 삼았던 만큼 life story를 써오라는 말씀에 쉬이 써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어떤 시점에서,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가 고민이 되어 한참이 걸려 이제야 보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름을 개명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교를 진학한 이후로 몸이 자주 아파 이름이 저에게 너무 드센 것이 아닌가 걱정한 엄마가 한자의 뜻만 바꾸어주었습니다. 처음엔 옥홀 정에 진실로 윤을 써서 진짜 옥이라는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옥홀 정이란 한자에는 임금 왕이란 한자가 부수로 들어가 있어 저의 팔자엔 과분한 듯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뉴스를 보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입은 영국 유학생을 보곤 마음이 아팠습니다. 같이 티브이를 보고 있던 엄마에게 저런 사람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냐고 물으니, 엄마는 '외교관 같은 사람들이 도와줄 거야.'라고 답해주셨어요. 그때부터 저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되려던 것이었습니다. 왜 외교관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외에 나가 사는 사람들의 처지가 국내에 머무르는 사람보단 더 힘들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정말 원하던 대학은 아니었으나, 생각지도 못한 대학에서 합격통지를 받고 사전조사가 되지 않은 채로 상경했습니다.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한다는 것과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타 지역으로 대학을 가면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서 말이죠.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모두가 영어로 웃고 떠들 때 알아듣지 못해 눈치를 보며 적당히 웃었습니다. 남들이 노는 시간에도 공부를 하면 유학파 친구들 사이에서 조금은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것도 안되었습니다. 애쓰고 산 것이 버거웠는지 몸도 고장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생리가 끝나지 않더니, 결국 어느 날은 난소의 물혹이 터져 저혈압으로 응급실 신세를 졌습니다. 복강 내 피가 많이 고여 심장에 쇼크가 올 수도 있었고, 오전 1시에 부산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가 갔습니다. 딸이 위험하단 이야기에 부모님께선 한달음에 차를 몰고 올라오셨습니다. 의아하게도 병원에 누워있는데 행복했어요. 조금만 더 쉬면 좋겠단 생각과 아픈 건 꽤나 좋은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우관계도 학업과 비슷했습니다. 저와는 성향이 맞지 않은 친구들과 지내느라 고역이었습니다. 그런 저의 마음을 친구들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총 5명의 친구가 어울려 놀았는데, 저에겐 한마디 귀띔도 없이 4명이서 여행을 갔습니다. 한꺼번에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바꾸고선 그날 이후로 저에게서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것을 본 저는 혼자가 된 것을 확인하게 될까 봐 먼저 연락해볼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과 친구들과 멀어졌어도 저에겐 기숙사 같은 방을 쓰던 친구들이 남있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2년 반을 함께 산 친구와 사소한 일을 계기로 크게 싸워 제가 방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로 한동안 왼쪽 귀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숨어서 밥을 먹고 사람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래도 태연한 척 살았습니다.


그맘때쯤 사소한 일로 믿고 의지하는 저의 오빠와 심하게 싸웠습니다. 그만하자고,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도 말을 퍼붓는 오빠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어디 마음을 풀어둘 데가 없어 모르는 절에 들어가 울면서 절했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는 아끼던 신발까지 밑창이 떨어져 신발에 물이 들어왔습니다. 질척이는 이게 인생의 맛인지 뭔지 몰라도 남들은 젖은 양말까진 모를 테니까 또 아무렇지 않게 걸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공부를 핑계로 휴학했습니다. 외교관 공부를 직접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을 땐, 공부만 하면 원하던 것이 될 수 있단 생각에 정신적으론 신경 쓰일 것이 많았지만 기뻤습니다. 먹기 싫은 밥이어도 미래를 생각하며 밥을 챙겨 먹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가 신림 고시촌에 들어갔을 때인데, 특별에 기억에 남는 일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처음 신림에 들어갔던 날, 잠결에 뻗은 손끝에 인형이 만져지는 것 같았습니다. 집에 있는 제 침대 위에 두고 온 강아지 인형이 만져지는 느낌이었어요. 울면서 잠이 들었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다 외국어 시험을 앞두고 엄마가 반찬을 택배로 보내주었어요. 그래서 택배 박스를 들고 자취방까지 올라오는데, 박스가 너무 무거워서 눈물이 났습니다. 불 꺼진 어두운 방에 올라오자마자 박스를 내려놓고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습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가고 싶다고 하자, 엄마는 그 시험만 치고 오면 어떻겠냐며 권하셨습니다. 저를 응원하시기에 한 말씀임을 저도 압니다. 그래서 부산에 내려오지 않고 공부를 마저 하고 지냈습니다. 내가 많이 약해져 있구나, 의지는 다 잡으면 되는 거라고 조금 더 열심히 살자고 다독였습니다. 그리곤 노력만 하면 모든 걸 성취할 수 있을 거란 게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비슷한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공부를 하고 겨우 밥을 챙겨 먹으며 늦은 밤에서야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도 하혈을 하고 있었습니다. 피가 심하게 비치는 날엔 정신이 혼미했고, 만사를 제쳐두고 편도 1시간 거리의 산부인과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저를 대학생 때부터 오래 봐온 산부인과 선생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저는 괜찮은데 왜 하혈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에, 선생님께선 '무의식과 정윤 씨의 생각은 다를 거예요. 매일 피를 보면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어요?'라고 말해주셨어요. 그제야 무의식과 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았어요. 실은 매일 불안해하며 살고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재미없는 이 이야기는 역경이 많았지만 드라마의 해피엔딩처럼 치닫지 않았습니다. 자취방에서 일어서는데, 갑자기 세상이 빙글 돌더니 저는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일어나 보니 늦은 밤이었습니다. 혼자 쓰러졌다가 깨어났단 사실에 세상에게 섭섭했던 건지, 아무리 애써도 제자리걸음인 저의 모의고사 성적이 참담한 건지 그날 그렇게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곤 공부를 접고 부산에 내려왔습니다.


삶에 의미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의 저는 매일 죽게 해달라고 비는 것 말곤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디론가 가야 할 때인데 가지 못하고 있는 것과,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도 몰라 그냥 죽었으면 했습니다. 숨만 붙은 고기 같았습니다. 당시에 쓴 일기를 보면 저는 저를 고기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은 힘이 또 났다가도 어느 날은 크게 방황했습니다. 어느 날은 진짜로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엄마가 건강하라고 맞춰준 팔찌와 목걸이 등을 다 빼고 외출했습니다. 남이 주워가는 걸 원치 않아서요. 그런 날이면 엄만 다급하게 어디냐며 전화를 하셨습니다. 티 내지 않고 살려했는데 엄만 알았던 것일까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엄마 말에서도 불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엄마의 기도가 저의 기도보다 영험했던 것인지, 죽게 해 달라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세상엔 살고 싶은 이유가 많다는 것을 압니다. 저를 이만큼 아끼는 부모님과 오빠, 제 세상의 전부처럼 저만 바라보는 고양이, 그리고 예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는 친구도 있습니다. 죽고 싶을 때마다 저를 번번이 살고 싶게 만드는 세상이 너무 밉고 이젠 이 갈등으로 지쳐갑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이런 마음 대신 저는 온전히 잘 살아보고 싶어 졌습니다. 괜찮다고만 말하다 보니 자해하듯 뜯어낸 살들로 절뚝거리는 발만이 저의 고통을 아는 것 같습니다. 뭐가 저를 불안하게 하는지 알고 싶어 졌습니다. 다 지나온 일이고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추억에는 힘이 없다 하던데요. 그렇지만 추억을 회상하는 저는 유리 파편 위를 걷는 것처럼 아픕니다. 


부모님께서 바꿔주신 저의 새 한자 이름은 정원 정, 따뜻할 윤을 쓰고 있습니다. 따뜻한 정원이란 이름을 가진 제 이름이 썩 마음에 들어 자꾸 곱씹게 됩니다. 이름 따라 살아진다는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저는 행복할 수 있을까요? 괜찮지 않으면 얼마만큼을 울고, 얼마만큼을 드러내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저는 또 기분이 괜찮아져 별문제 없이 산 사람처럼 느껴져 어딘가 머쓱한 기분이 듭니다.  202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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