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한가운데를 살아간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의 생애
원작
Nigel Cliff, "Moscow Nights: The Van Cliburn Story-How One Man and His Piano Transformed the Cold War", Harper, 2016. (Kindle edition)
러시아계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음대 출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피아노를 접하고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이끌린 미국인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Van Cliburn, 1934-2013)은 열일곱살이 되던 해에 고향인 텍사스의 시골 마을을 떠나 러시아계 피아니스트 로지나 레빈(Rosina Lhévinne, 1880-1976)이 군림하던 뉴욕 맨해튼의 줄리어드에 입학하게 된다.
동유럽 출신의 교양있는 유태계가 다수를 차지하던 동료 학생들 틈에서 텍사스 지방 사투리를 구사하며 수련?과 방황의 시기를 보내던 시골청년 클라이번이 결국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라는 전에 없던 무대를 통해 모스크바에 입성하며 스타 연주자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은, 당시 미국인 피아니스트로는 매우 드물고 독특한 사례로 회자되었다.
1958년 콩쿠르 우승 후 맨해튼의 브로드웨이에서 진행된 대규모 카퍼레이드에는 당시 경찰 추산으로 10만명의 뉴욕시민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클라이번이 “대통령 다음으로 유명한 미국인”이었다는 저자의 평가가 그저 과장된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 유명한 일명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그가 서른 살도 되기 전인 1962년에 그의 고향 텍사스의 포트워스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제2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열리던 해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전기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도 당시 미국과 소련 정세의 긴장 상황을 틈틈이 삽화처럼 제시하며, 얽혀있던 역사 속 장면들을 따라간다. 간혹 영상화를 의식했나 싶을 정도로 자세히 구성된 대화나 묘사가 과한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당시의 분위기와 배경을 떠올리며 클라이번의 궤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현장감을 더한다. 또한 20세기 미국에서 러시아 음악이 권위를 얻고 대세를 이루게 된 맥락에 대해서도 비교적 설득력 있는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책의 도입부에서는 한 세기 전의 인물인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가 1875년 피아노 콘체르토 1번의 창작을 마무리하던 시기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상징이자 클라이번을 스타 연주자로 올라서게 한 계기가 된 이 작품은, 바로 그 해 한스 폰 뷜로(Hans Guido Freiherr von Bülow, 1830-1894)의 미국 투어 중 보스턴에서 초연되었고, 차이코프스키와 미국의 인연은 이후 1891년 맨해튼의 카네기홀 개관 기념 음악회 참석으로 이어지게 된다.
책의 제목인 “Moscow Nights"는 1955년에 러시아에서 발표된 가곡 (Подмоско́вные вечера́)의 제목이다. 클라이번이 러시아 무대에서 연주하면서 미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된 노래로, 그는 이후 1987년 말 백악관에서 열린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미소 정상회담 자리에서도 상징적인 이 곡을 연주했다. (그는 이미 1970년대 말부터 공식적인 무대활동에서 물러나 은퇴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