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기술 이전 작품들에 대한 흔한 연주평들과 그 공허함에 관하여
"서울문화재단" 소식지 <문화+서울> 2016년 7월호에 수록되었던 글입니다.
“현존 피아니스트 가운데에서 리스트를 올바르고 아름답게 표현해 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비교적 요즘 사람 가운데에는 베르만이 뛰어나고, 예전 사람 가운데서는 클라우디오 아라우 정도가 아닐까 해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7~)의 2013년 작품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중에서, 작품의 주요 모티프이기도 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순례의 해(巡礼の年)’ 가 녹음된 음반을 들으며,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多崎つくる)에게 대학 친구 하이다 후미아키(灰田文昭)가 전하는 감상 중 일부이다. 두 사람이 듣고 있는 음반은 1977년에 발매된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Lazar Berman, 1930~2005)의 연주이다.
한국어판 제목은 ‘...순례를 떠난 해’로 번역되었지만, 원작 소설의 제목(『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彼の巡礼の年』)은 리스트의 피아노곡 「Années de pèlerinage」의 일본어 제목‘순례의 해(巡礼の年)’에서 유래한다.
소설 속 음악들만으로 음반이나 콘서트가 기획될 만큼, 하루키는 글의 재료로 음악을 적절히 활용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에 언급된 음악들을 목록화하거나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례도 있다. 특히 앞서 인용한 대사에서처럼 특정한 ‘음반’을 제시하며 등장인물들의 말을 빌려 전하는 하루키의 음반 평은, 그 어떤 전문가들의 평론 이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하루키의 소설이 출간되기 약 80년 전인 1934년, 일본의 1세대 서양음악 평론가 노무라 코이치(野村光一, 1895~1988)는 『레코드 음악독본』이라는 저서에서 당시 베토벤의 작품을 녹음한 연주자들의 음반을 비교하는 글을 남겼다. ‘켐프의 베토벤 연주는 슈나벨의 음반이 발매되기 전까지 레코드 계의 독보적 존재였다. 바우어의 베토벤도 위대하지만, 켐프에 비하면 별로이고, 그 외에는 베토벤을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여러 명의 연주자가 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녹음한 결과물에 대한 비교 평가라는 점에서, 하루키의 소설과 노무라의 글은 맥락은 다르지만 유사한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정 작품을 어떻게 연주해야 한다는 가치가 담겨있는 것도 공통적이다. 같은 곡을 서로 다른 연주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 연주의 특성상, 이와 같은 공개적 평론은 단지 개인의 감상을 넘어서 청취자들의 취향 형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곤 한다.
노무라의 글에서 거론된 피아니스트들은 독일인 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 1895~1991), 오스트리아인 아르투르 슈나벨(Artur Schnabel, 1882~1951), 영국인 해롤드 바우어(Harold Bauer, 1873~1951)로 이들은 각각 1930년을 전후해 베토벤의 작품 연주를 녹음으로 남겼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예전 사람’으로 지칭되고 있는 칠레 출신 미국인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 1903~1991)가 리스트의 ‘순례의 해’를 녹음한 시기도 그 즈음인 1920년대 후반 경이다.
백 년 남짓한 레코딩 역사의 초창기를 장식한 이들은 작곡자가 곧 연주자이던 기존 관습에서 벗어나, 연주에 몰두하게 된 ‘전업 연주자’ 시대의 개척자들이기도 하다. 이전 세대 음악가들과 달리, 자작곡보다는 과거의 작품을 매개 삼아 경연(競演)하며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같은 곡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두고 비교 평가하는 작업이 근대 지식인들의 주요 관심사로 자리 잡은 것도 이 때부터이고, 콩쿠르 시대가 열리면서 이러한 관행은 더욱 극대화되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러시아 출신의 라흐마니노프(Serge Rachmaninoff, 1873~1943)와 프로코피예프(Sergey Prokofiev, 1891~1953)는 직접 만든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까지 남길 수 있었던 과도기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원작자의 연주만이 작품 해석의 유일한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원작자의 연주가 남아있는지의 여부가 이후의 연주자나 감상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동시대에 활동하던 전업 연주자들에 비해, 자신의 작품 연주를 음반 자료로 남긴 이들의 연주를 들으며 표현이 ‘올바르다’거나 ‘제대로 연주한다’는 식으로 잘라 평가하는 경우도 당연히 드물다.
만약 베토벤이 직접 연주한 소나타, 또는 리스트가 직접 연주한 ‘순례의 해’가 남아있었다면, 이들의 작품을 연주한 후대 연주자들에 대한 평가 잣대도 달라졌을까. 녹음을 남길 수 없던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일수록 더 많은 해석과 상상이 덧붙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연주를 비교 평가하는 것은 감상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음악 작품을 고전의 원문에 비유한다면, 연주는 2차 문헌에 해당한다. 녹음과 편집을 거쳐 음반으로 만들어진 자료는 3차문헌 즈음일 것이다. 원작이 있기에 해석도 가능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베토벤 시대의 음악 청취 행태를 연구한 미국인 음악학자 본즈(Mark Evan Bonds, 1954~)는 “과거의 연주 복원은 실현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하면서도, 예전 청중들이 향유하던 청취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익숙하게 듣던 음악이라도 새로운 의식을 갖고 들어볼 것”을 강조한다. 때로는 연주에 대한 자의적 비교나 평가를 잠시 내려놓고, 1차 문헌으로서의 원작에 주목하려는 시도가 필요할 듯하다. 관점의 작은 변화가 전혀 다른 차원의 음악 감상을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