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세이지가 전하는 근대 일본의 독일 계승과 명분
小澤征爾 語り, 『小澤征爾 指揮者を語る:音楽と表現』 (有働由美子・インタビュー、100年インタビュー制作班編)PHP研究所、2012。
岩村 正史, 『戦前日本人の対ドイツ意識』, 慶應義塾大学出版会, 2005.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대화에서 뿐 아니라, 여러 기회의 인터뷰들을 통해 ‘독일음악’의 절대적 지위에 대한 확고한 의견을 자주 드러내 왔는데, 특히 캐나다 출신의 글렌 굴드(Glenn Gould, 1932-1982)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연주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이나, 뉴욕 필하모닉에 ‘독일적인 맛’이 부족한 이유 같은 것들을 ‘평등’을 지향하는 아메리카 특유의 정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 스스로도 1973년부터 30년 가까이 재직했던 보스턴 심포니에서 “어떻게든 독일음악을 하고 싶었던”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는데, 그와 같은 노선에 반발했던 콘서트 마스터가 결국 사임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제국의 괴뢰국가로 성립된 만주국(1932-1945)에서 1935년에 태어난 오자와 세이지는 어린시절 도쿄로 이주해 피아노를 배웠고, 고등학교 재학 중 오케스트라 지휘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이던 1959년 유럽행을 택한 이후 20세기 후반 서구에서 활약한 최초의 아시아계 지휘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일생동안 지휘의 기본기로 삼았던 가치들을 일본인 스승 사이토 히데오(齋藤 秀雄, 1902-1974)에게서 배웠음을 늘 강조했고, 사이토 선생의 문하에 있던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사이토 기념 오케스트라(サイトウ・キネン・オーケストラ)를 결성해 연주회를 비롯한 기념 행사를 정기적으로 진행해 왔다.
메이지 초기의 영어학자 사이토 히데사부로(斎藤 秀三郎, 1866-1929)의 차남으로 태어난 사이토 히데오는, 일찍부터 서양음악에 관심을 보였고, 황실 소속 첼로 연주자에게 첼로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스무살이 되던 1922년에는 일본 최초의 (NHK교향악단의 전신이 된) 전문 오케스트라 신교향악단을 설립(1926)한 코노에 히데마로(近衛 秀麿, 1898-1973)와 함께 독일로 떠나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첼로를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귀국 후 신교향악단 첼로 연주자로 입단(1927)했고, 이후 지휘자로 데뷔했는데, 1930년 다시 베를린으로 유학해 고등음악원을 수료했다. 종전 후에는 (이후 개교한 토호음대朋学園大学音楽学部의 전신에 해당하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교실’ 개설에 참여하며 교육자로 입지를 다졌다.
오자와 세이지가 지휘자로서 유독 강조한 ‘독일음악’ 지향에는 이처럼 독일 영향권에서 음악 활동의 기반을 쌓았던 스승 사이토 선생의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게이오대 법학부에서 일본정치사를 전공한 이와무라 마사시 박사는 1930년대 독일의 나치당 집권 이후 일본과 독일 사이에 체결된 방공협정防共協定을 계기로 당시 일본의 여론을 주도하던 (요미우리読売新聞, 도쿄아사히東京朝日新聞,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新聞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에서 상당 기간 나치 독일에 관련된 친화적 보도가 지속되었음을 지적하고, 이 당시 일본인들이 공유하던 독일에 대한 인식이 형성될 수 있던 맥락과 근거를 제시한다.
아울러 사이토 선생이 1930년대 후반 신교향악단 지휘를 맡았던 독일계 지휘자 로젠슈토크(Josef Rosenstock, 1895-1985)와 긴밀히 교류하며 이후의 지휘 활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정황을 포함해, 1940년대 초 전시체제에 접어들며 신교향악단의 베토벤 연주가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도 이 시기에 유년기를 보낸 (오자와 선생 또래의) 세대들에게 독일 음악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가벼울 수 없었을 것이다. (1983년부터 시작된 일본 연말의 성대한 이벤트이자 ‘일본의 베토벤’이라는 서구화 이후 일본에 확립된 새로운 전통으로 상징적인 ‘1만명의 다이쿠(サントリー1万人の第九)‘의 명분을 이루는 배경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