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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r 26. 2024

11 사랑,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징안공원 (静安公园)


호화로운 백화점과 호텔, 오피스 빌딩 숲 사이에 홀로 고즈넉한 초록빛 공원. 나뭇잎 무성한 플라타너스 가로수며, 연초록빛 넓은 잔디밭, 기묘한 모양의 바위와 돌들, 작은 동굴, 호숫가에는 이국적 음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까지, 징안공원에 들어서자 잠시 딴 세상에 와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상하이 징안공원 (静安公园)


산책길을 따라 죽 놓여 있는 벤치에 노인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다. 이제 막 카페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고 오피스 빌딩 안에서 사람들이 곧 업무를 시작하려는 이른 아침, 공원 안 벤치는 이미 만원이다. 미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노인들이 벤치 주변을 서성인다.


징안공원 (静安公园)


대화하다 간혹 큰 소리로 웃는 노인들. 벤치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바느질을 하는 할머니. 가져온 보온병을 들고 후후 불어가며 차를 마시는 노인들. 아침 댓바람부터 공원으로 밀려 나온 저 노인들의 마음은 정말 표정처럼 평온할까?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내가 이미 노인들은 불행하다고 단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초록색 나뭇잎보다 가을바람에 바닥을 뒹구는 낙엽을 더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인간의 노년만은 불쾌하고 추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징안공원 (静安公园)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온다. 경쾌한 음악을 틀어놓고 칼춤이나 부채춤을 추는 노인들, 남녀가 짝을 이뤄 사교춤을 추는 노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춤사위를 넋 놓고 바라보다 한갓진 곳에 나란히 앉아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보행기에 앉은 두 노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세상을 등진 채 덩그마니 떠 있는 두 개의 달이 애틋해 따스한 봄바람이 분다.


징안공원 (静安公园)


요즘 나는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책장을 덮곤 했다.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랑 이야기를 읽고 또 겪었기 때문일까. 빤한 결말을 너무 쉽게 짐작했다. 아직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근력과 체력이 다 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음이 먼저 폭삭 늙어버린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신은 나이와 함께 망각을 선물해 주는지 모른다. 이미 알아버린 사랑 이야기의 패턴 같은 건 잊으라고. 마치 생전 처음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다시 설레라고.


징안공원 (静安公园)


알록달록하고 폭신한 솜사탕 같은 사랑 대신 볼품은 좀 없어도 탱글탱글 잘 익은 알밤처럼 단단한 것들을 주워 모은다. 혹여나 코 고는 소리에 잠 못 들까 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잠자리에 들어오는 남편이 내는 사각사각 소리, 잠든 내 이마에 살짝 갖다 댄 입술의 미지근한 온기 같은 것. 늦은 오후 따뜻한 차 한 잔에 어울리는 티푸드는 화려한 케이크만이 아니다. 약과나 고구마도 달콤하고 든든하다. 사랑이 끝난 게 아니었다. 모양과 빛깔이 좀 달라졌을 뿐. 


징안공원 (静安公园)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중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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