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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Feb 26. 2024

[상하이의 사랑법] 그(녀)를 믿을 수 있을까?

창더꽁위 (常德公寓)

가깝게 지냈던 지인에게 친구 차단을 당했다. 누구보다 의미 있고 강렬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이라 믿기지 않았다. 한참 후 전해 듣게 된 그 이유는 더 충격적이었다. 내가 외도하고 있다는 심증으로 인연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함께 들은 남편과 아이들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남편은 고민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한동안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장아이링 카페


머릿속이 복잡해 하루 종일 하염없이 걸었다. 다리가 아파 잠시 쉬어갈 겸 카페 문을 열었다. 제법 찬 공기를 맞으며 걷다 따뜻한 카페 안으로 들어서니 몸도 마음도 노곤해졌다. 작은 테이블 앞에 놓인 동그란 가죽 의자에 앉아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색, 계> 실제 모델인 정핑루


창가에 홀로 앉아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는 여인이 눈에 띈다. 거리가 좀 있긴 해도 나와 마주 보는 형국이라 노골적으로 바라보면 실례가 될 것 같다.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펼쳐 보는 척하며 여인을 흘깃 훔쳐본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인은 창밖을 바라보던 눈길을 거둬들이고,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 전체를 볼 수는 없지만, 여인의 꽉 다문 입매가 몹시 고혹적이다.



혹여 눈이 마주칠까 얼른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장아이링의 산문집은 번역 상태가 엉망이라 문장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치파오를 입고 살짝 턱을 치켜든 얼굴이 낯익다. 읽고 있던 책 표지에 있는 여인과 같은 얼굴. 홍차 한 잔을 시키며 카페 주인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카페가 있는 건물이 장아이링이 1939년부터 1947년까지 살았던 창더꽁위(常德公寓)라고 한다. 장아이링의 얼굴을 다시 바라본다. 첫 원고료를 받아 백화점에 립스틱을 사러 갔다던 그녀의 도도한 표정은 창가에 혼자 앉아있는 여인과 묘하게 닮았다.



“그녀가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마치 스타킹의 올이 나간 후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이 종아리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실패의 예감이 그녀를 감쌌다.”

장아이링 <색, 계> 중


장아이링 산문집


여인이 떠나려는 모양이다. 일어서려다 주춤하고 서서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2분이 채 안 되어, 여인은 작은 손가방을 챙겨 황급히 카페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상대를 유혹하되 의심받지 않기 위해 늘 경계해야 했던 여인, 결국 사랑 앞에 무너져 목숨마저 던지며 경계를 무너뜨린 여인. 여인이 떠난 자리에는 립스틱이 묻은 커피 잔과 그녀가 던진 질문만 남았다.


장아이링 카페


그를 향한 내 마음은 사랑일까. 내가 사랑하는 것처럼 그도 나를 사랑할까.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의심의 씨앗을 건네받은 그는 과연 내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여인의 고민이 곧 내 고민이었다. 연인이 매국노가 아니고 내가 스파이가 아니라 해도,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안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사랑을 하면 할수록 확신에서는 점점 더 멀어진다. 사랑하기에 경계에 서서 오늘도 한없이 흔들린다.


장아이링 카페
장아이링 카페


윤소희 칼럼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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