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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ug 01. 2024

1 사이코드라마 무대에서 발가벗겨질 뻔한 예주

'시몬과 페로'에 숨겨진 비밀

무대가 어두워졌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여섯 명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중 맨 오른쪽 자리에 긴 머리를 등받이 위로 늘어뜨리고 있는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시몬과 페로.”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낯익은 목소리였다. 

“네? 어떤 사진인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사이코드라마*를 진행하던 연출자가 급히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당황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노인한테 가슴을 풀어헤치고 젖을 먹이는 여인이 그려진 그림이요. ‘로마의 자비’라고도 알려져 있는 루벤스 그림.”

긴 머리 여학생은 무대 위라는 걸 의식하지 않고 또박또박 답했다.

“루벤스 그림이 가족 앨범에 끼워져 있는 이유가 있을까요?”

흥미로운 극의 소재가 되리라 판단한 연출자의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먹이를 발견한 맹수의 소리처럼 들렸다.

“어렸을 적 그 그림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도대체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일까? 늙은 노인에게 젖가슴을 빨리고 있는 여인의 표정에서 황홀함도 수치심이나 공포감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거든요. 근데 노인을 자세히 보니 손을 뒤로 한 채 묶여 있는 거예요. 암튼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 강렬한 인상을 주는데, 도무지 이해는 되지 않고. 몰래 오려서 앨범에 살짝 끼워 놓았죠. 나중에 찾아보니 그 둘이 아버지와 딸이라는 거예요. 감옥에 갇혀 굶주림에 지쳐 있는 아버지에게 줄 것이 젖밖에 없어 불어 있는 젖을 아버지 입에 물린 거라는 설명에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나요.”


시몬과 페로 (로마의 자비) _ 루벤스


연출자가 바로 개입하지 못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엄마가 미대 가라고만 안 했으면 미대생이 됐을지도 모르거든요. 후훗.”

예주다. 긴 머리 여학생은 내가 짐작했던 대로 예주가 맞았다. 우습지 않은 일로 웃는 건 예주의 버릇이다. 사이코드라마 공연의 성공 가능성을 감지한 연출자가 예주에게 주인공이 되어 함께 극을 꾸며도 되겠냐고 물었고 예주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무대 위에 앉아 있던 나머지 다섯 명이 관객석으로 돌아가고 예주와 연출가만 무대 중앙에 나란히 앉았다. 관객 쪽으로 돌아 앉아 조명까지 받으니 예주의 시폰 원피스가 유난히 희게 빛났다. 받쳐 입은 검은색 재킷의 소매를 살짝 접어서인지 발랄해 보였다. 검정 스타킹의 도트 프린트 때문에 예주의 길고 매끈한 다리로 시선이 끌렸다. 예주는 비주얼 자체가 관객을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있는 데다, 관객에 대한 두려움도 보이지 않으니 사이코드라마 연출자는 오늘 공연의 성공을 예감하고 있을 것이다.


호기심으로 무대 중앙을 응시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나만 혼자 가슴을 졸이고 있다. 당장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예주의 손목을 잡고 이곳을 나가고 싶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질 예주를 구해내고 싶다. 예주가 신뢰하며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하지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무대 위로 뛰어올라갈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다. 이런 내가 이 순간만큼은 싫다.  


사이코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의 삶이 무대 위에서 대본 없는 연극으로 재연된다


드디어 사이코드라마 본극이 시작됐다. 

사이코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의 삶이 무대 위에서 대본 없는 연극으로 재연된다. ‘마치 ~인 척’ 하는 연기를 통해 금지되고, 고통스럽고, 정서적 상처가 되었던 경험들을 안전하게 직면한다. 극을 리드하고 주인공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연출자가 있고, 나머지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프로타(주인공)’와 보조자아를 맡는다. 오늘은 사이코드라마의 진행 방식을 잘 모르는 프로타와 외부 관객들을 대상으로 극을 진행해야 하는 공연의 성격상 연출자가 프로타를 지목할 수밖에 없고, 연출자의 역할이 그만큼 커진다. 아직 학부 학생인 연출자가 미성숙하게 진행한다면 프로타인 예주가 극을 진행하는 동안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극에서 예주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연출자는 예주에게 사이코드라마 회원들 중 예주의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을 맡아줄 사람들을 고르게 했다. 예주는 무대에서 엄마와 계속 다투었다. 상담실에서 보였던 엄마와의 갈등이 무대 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엄마 역할을 맡은 여학생이 예주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하지 못하자, 연출자가 잠시 예주와 예주 엄마의 역할을 바꾸게 했다. ‘역할 바꾸기’를 통해, 예주가 직접 엄마가 되어 엄마의 대사를 했다. 다시 역할을 바꾸었다. 예주 엄마 역을 맡은 학생은 예주가 보여준 대로 예주 엄마의 역할을 좀 더 실감 나게 연기했다.


예주: (짜증 난다는 듯이) 엄만 왜 맨날 아빠를 그렇게 힘들게 해?

예주 엄마: (예주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네가 엄마 인생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예주: (갑자기 조금 주저하며 작은 목소리로) 모르긴 뭘 몰라.


연출자가 바로 끼어들었다. 

“이 무대에서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의자에 올라서 보세요. 그리고 예주 엄마는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주세요. 자, 다시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보세요.”  


예주: (엄마를 내려다보며 자신감이 생긴 듯 큰 소리로) 모르긴 뭘 몰라. 나 다 알아. 엄마가 감춰둔 일기장 내가 다 봤단 말이야. 아빠랑 나는 엄마한테 사랑받고 싶은데, 엄마 머릿속에는 온통……. 


예주가 울먹이며 말을 멈추자, 연출자가 개입했다.

“예주 양이 힘들어 보이는데. 예주 양이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도록 예주 양의 분신을 세워 돕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분신이 하는 말을 듣고 예주 양 마음에 맞으면 따라 하고 아니면 그냥 듣고 있거나 고쳐 말하면 돼요.”

예주가 연출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긴 머리 여학생 하나가 예주 옆에 나란히 의자를 놓고 예주와 똑같이 두 팔을 팔짱 끼고 서서 바닥에 앉은 엄마를 바라보았다. 연출자가 예주의 분신이라고 부른 예주의 ‘이중자아’는 예주의 자세와 얼굴 표정을 그대로 따라 하며 예주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신체 움직임과 표정 그리고 자세가 의미하는 바를 예주가 거울 보듯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예주가 꺼리거나 주저하는 내면 감정을 대신 표현해 줌으로써 무대 위에서 엄마와의 상호작용을 자극하거나 더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예주의 이중자아: (엄마를 향해 큰 소리로) 아빠랑 나는 외로웠단 말이야.

예주: (조금 자신 없는 듯) 외로웠어.

예주의 이중자아: 엄마는 아빠랑 날 사랑하지 않아.

예주: (조금 커진 목소리로) 우릴 사랑하지 않아.

예주의 이중자아: (큰 소리로) 머릿속엔 온통 딴생각뿐이고. 제발 아빠랑 나를 사랑해 달란 말이야!

예주: (엄마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큰 목소리로) 온통 딴생각뿐이고. 다 엄마 때문이야. 복수할 거야.


예주의 감정이 격해졌다. 예주는 의자 위에서 발을 굴렀다. 연출자가 조금 주의 깊게 들었다면 ‘다 엄마 때문이야!’라는 말에서 무엇이 엄마 때문인지 파고들어 가 예주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건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면 이 많은 관객들 앞에서 예주가 지속적으로 당해온 성폭행 사실이 폭로될 것이다. 심장이 뛰는 속도가 더 빨라지고 손에 자꾸 땀이 뱄다. 나는 엉덩이를 괜히 들썩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지금부터 이 쿠션을 엄마라 생각하고 마음껏 엄마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세요. 때리거나 던져도 돼요. 아시겠지만 이 쿠션은 진짜 엄마가 아니니까 안전해요.”

연출자의 말에 관객 중 몇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깊이 파고들지 못한 연출자의 부족한 능력에 안도했다.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로 들어갔던 예주가 관객의 웃음 덕분에 최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다시 이성적으로 돌아왔다. 예주의 얼굴에도 살짝 웃음이 감돌았다. 


예주가 의자에서 내려오고 연출자는 예주가 서 있던 의자에 쿠션을 올려놓았다. 예주가 쿠션을 때리고 집어던지고, 바닥에 떨어진 쿠션을 발로 찼다. 이미 최면에서 빠져나온 예주는 연출자의 기대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행동만을 연출했다. 지금까지 무대에서 엄마에게 던졌던 말들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 자신과 가족에 대한 내밀한 정보를 끄집어내지 않았다. 진짜 자신의 감정에 완전히 몰입한 프로타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모습을 흉내 내는 배우처럼 인위적으로 보였지만, 다행히 연출자는 그걸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예주 양, 지금까지 엄마한테 그동안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을 표현해 봤는데요. 이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에요. 지금 기분이 어때요?”

예주의 격렬했던 표현이 조금 수그러들자, 연출자가 끼어들었다.

“속이 좀 후련해진 느낌이에요.”

이미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 예주는 여유를 되찾았다. 노련한 여배우를 보는 듯했다.

“엄마나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아빠한테 얘기하고 싶어요.”

예주 얼굴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예주의 요청대로 무대는 예주가 아빠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바닷가라고 가정되었다. 예주 아빠로 지목된 남학생과 예주가 바다라고 가정된 관객석을 보며 나란히 서있다. 예주 아빠가 예주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 몸속의 모든 혈액이 머리로 몰렸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이 모두 구겨졌다. 


예주: (아빠 품으로 더 파고들어 살짝 고개를 기대며) 아빠.

예주 아빠: (조금 어색하고 긴장한 듯이) 예주야.

예주: 사실은 나 아빠한테 오늘 고백할 거 있는데. 나 아빠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처음이야,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건. 


무대 정면 앞 좌석에 앉아 있는 내게는 예주 얼굴의 솜털 하나까지 다 보였다. 내가 와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표정으로 다른 쪽만 응시하던 예주의 시선이 갑자기 내 눈을 정확히 찾아 응시했다. 3초간 마주친 시선. 3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예주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2주나 상담을 펑크 낸 것에 대해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모든 생각과 감정을 지워낸 듯 투명한 표정이었다. 이곳의 모든 사람이 배경으로 사라지고 잠시 예주와 나 둘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초 후 예주는 다시 무대 위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예주: (잠시 멈춘 뒤 슬픈 목소리로 또박또박하게) 근데 아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

순간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예주를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마침 연출자가 금광이라도 발견한 듯 끼어들어 말하기 시작했다.

“예주 양이 아빠를 만나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고백했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하던 예주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어려서부터 줄곧 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할 거란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근데 최근에 어떤 사람을 만났고, 그 만남이 문제예요. 아직 사랑이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나이 차이도 많고……. 암튼, 사랑하면 안 돼요. 후훗.”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터지는 웃음이 예주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예주를 바라보았다. 예주는 일부러 피하는지 계속 다른 쪽으로만 시선을 주었다. 

“현실에선 절대 불가능하단 걸 알아요.”

예주가 ‘절대’란 말에 힘을 주어 말하자, 가슴 한편에 동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를 한번 이렇게 안아주기만 하면, 제 마음을 다 추스르고 일상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사이코드라마 본극 후 셰어링 시간


연출자가 본극을 마무리하고 셰어링 시간을 갖기 위해 예주를 가운데 두고 다른 사이코드라마 회원들을 반원 모양으로 빙 둘러앉게 했다. 관객석에서 손을 든 사람을 보고 연출자가 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밖은 제법 어두웠다. 바깥공기를 모두 마셔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두근거리던 가슴이 조금 진정이 되었다.


겨우 학부 1, 2학년인 아마추어들 덕분에 예주는 무대에서 발가벗겨지는 위험은 피했지만, 한편으로는 예주의 진정한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연출자가 이끌었다기보다는 예주가 맘대로 연출하고 리드한, 예주의 사이코드라마였다. 그 드라마를 통해 억압해 누르려했던 내 안의 나와 만났고, 작고 폐쇄된 상담실 공간을 뛰어넘어 예주와 만났다. 한 번 밖으로 빠져나온 이 만남을 다시 상담실 안에 잘 담을 수 있을까.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 어두워진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다음 화에 계속)




*사이코드라마

1936년 모레노(J. L. Moreno)가 제안한 기법. 갈등상황을 단순히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의 심리적 차원을 탐구한다. 자신의 현실, 좌절당한 상황, 소망 등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연기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내재된 자신의 감정, 무의식적 충동 등을 깨닫게 되고, 현재 문제와 관련된 환상이나 기억을 찾아낸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안을 모색하고, 보다 건강한 방식으로 적응해 나간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의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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