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
예주가 상담에 나타나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4시 20분. 책상에 앉았다 일어나 창가를 서성였다 다시 책상에 앉기를 수십 번.
첫 회 상담을 받은 내담자의 40% 정도가 당장 상담받기를 원치 않는다는 조사 결과를 고려할 때, 상담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내담자가 있더라도, 내담자가 약속을 다시 이행하기 위해 상담실로 연락하지 않는 한 무시하는 것이 가장 상식적이다. 실제로 상담 약속을 펑크 내는 내담자를 수도 없이 만났다. 나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며 예주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주 예주는 남자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다시 한번 호소하며 구체적인 사례들을 언급했다. 예주에게 매력을 느끼고 접근했던 한 남학생은 손끝 하나 건드린 적 없음에도 예주가 마치 치한을 만난 듯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실제로 경찰서까지 끌려가기도 했다. 다른 남학생의 경우,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면전에서 예주가 먹은 것을 토해내기도 했다. 예주가 구애하는 남학생들에게 보기 좋게 물 먹이는 장면들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 같은 과 선배란 학생은 누구지?
내 입에서 이런 질문이 튀어나오다니……. 술집에서 같은 과 1년 선배가 예주에게 기습적으로 키스했을 때 예주의 몸은 저항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 부드러움과 따뜻함에 깜짝 놀라 몸이 열려 버렸다고 했다. 그 선배가 여자임을 밝혔을 때 내 반응은 다시 생각해도 너무 경솔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한 성경험 때문에 그 혐오감과 두려움이 남성 전체로 일반화되어 남자들의 구애에는 거부감과 저항을 보여 오던 예주가 상대적으로 부드럽게 다가오는 여성의 구애에 마음을 여는 것은 어쩌면 예주로서는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억압되어 인정하지 않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혐오감이나 두려움을 깨닫게 해 주고, 건강한 정체성을 찾아주는 것이 상담의 과제일 텐데……. 나를 믿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예주에게 충분한 경청과 공감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나도 모르게 거친 목소리로 다그치고 말았다. 그것도 화난 듯 무서운 얼굴로.
불행하게도 상담을 통해 내담자가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개연성이 항상 존재한다. 연약하고 무력한 내담자는 전지전능한 위치에서 휘두르는 상담자의 칼을 맞고 쓰러질 수 있다. 지난주 상담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범죄 사실을 밝히기 위해 취조하는 것도 아니고, 바람난 아내를 추궁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예주였다면 상담자의 그런 미성숙하고 예의 없는 질문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예주는 나에 대한 신뢰의 끈을 꽉 붙들고 있었는지, 내 질문에 모두 순순히 대답했다.
예주의 여자 친구는 같은 불문과 1년 선배인 오수빈이다.
“그 선배도 예주처럼 머리가 긴가?”
예주는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렇다고 대답했다. 붉은 꽃무늬 원피스와 순백의 원피스가 키스하던 장면. 아마 그들이었을 것이다. 어이없지만,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어떻게 상담을 마무리하고 어떻게 예주를 보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상담을 처음 시작했을 때도 저지르지 않았던 어처구니없는 잘못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혹시 내가 예주에게 이성으로서 끌리고 있지 않은가, 질문해 보았다. 상담자는 내담자와 그 어떤 성적인 관계도 맺을 수 없다는 윤리적 규범이 있지만, 상담자도 인간이니 때때로 내담자에게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성적으로 이끌릴 때 그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는 것은 상담자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다.
한 논문에 실린 연구 결과에 따르면, 90%에 가까운 상담자가 종종 내담자에게서 성적으로 끌리는 경험을 했다고 인정했고,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불편하게 느꼈다고 했다. 그중 3분의 2 가량은 그렇게 끌리는 마음 때문에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성인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서 종종 일어날 수 있는 감정이기는 하지만, 빨리 자각하고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내담자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상담자인 내 감정 때문에 객관성을 잃어 내담자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지 못할 수도 있고, 내 마음이 이끌림으로써 생긴 무력감을 상담 시간에 내담자를 지배하려고 애씀으로 해결하려고 할 수도 있다. 내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내담자에게 투사해 반응을 기대할 수도 있고, 이끌리는 감정을 내담자에게 노출하는 위험한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도 있다. 나 자신과 내담자를 보호하고 상담에서 지켜야 할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서지 않기 위해 내담자에게 이끌리는 마음과 경고신호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예주를 기다리느라 초조해진 마음을 다잡고 앉아 체크리스트를 떠올려보았다.
-특정한 내담자와 상담 시간을 더 갖고 싶어 한다.
-그 내담자가 앞에 있을 때 그 내담자가 힘이 있거나 매력이 있다고 느낀다.
-그 내담자와 함께 있으면 즐거움을 더 많이 느낀다.
-성적인 내용이 담긴 이야기를 즐긴다.
-에로틱한 방식으로 그 내담자에 대한 공상에 지속적으로 빠진다.
-다른 사람과 성적으로 개입될 때 그 내담자를 떠올린다.
-그 내담자가 앞에 있을 때 성적으로 흥분된다.
-그 내담자 앞에서 약해지는 느낌을 갖거나 혹은 인정받기를 원한다.
-다른 이들에게 불만족스럽고, 다른 사람들보다 그 내담자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불만족과 문제를 다룰 수 없게 된다.
-만약 내가 그/그녀와 좀 더 가까워지면, 그 내담자를 진정으로 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 내담자에게 나만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내담자를 생각하면 걱정이 되고 죄의식이 든다.
-성적인 관계로 전환함으로써 초래될 피해에 대해서 거부하게 된다.
머릿속에 경고등이 울렸다. 각 항목에 대해 강도는 약하지만, 해당되는 항목이 반 정도는 되었다. 거의 20년 가까이 상담을 하면서 여성 내담자에게 끌린 적이 한 번도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런 감정 자체를 없앨 수도 없고 없앨 필요도 없다. 단지 이 모든 반응을 내담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제대로 다루기만 하면 된다. 내담자와 함께 할 때 느끼는 에너지와 열정을 잘 활용하고 위험한 경계선을 넘지 않고 내담자를 보호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상담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
4시 40분. 예주는 오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초조하게 기다리지 말고, 일찍 퇴근하자. 퇴근길에 세훈이랑 한 잔 해야겠다. 내 장점은 차갑고 냉정한 머리 아니던가. 지난주 내 미성숙한 반응으로 예주가 상처 입었음에 틀림없겠지만, 상담의 자리로 오지 않는 한 난 예주를 도울 수 없다.
(다음 화에 계속)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의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1:1 글쓰기 코칭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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