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변화가 필요해!
‘놈’
세훈과 자주 가는 작은 카페 이름이다. ‘난쟁이 같이 작고 못생긴 땅의 요정’이란 뜻의 ‘놈(Gnome)’이지만 세훈과 나는 종종 “우리 놈 만나러 갈까?”하고 서로 한 잔 하자는 뜻을 전하곤 했다.
카페 주인은 ‘놈’이란 이름에 걸맞게 키가 작고 피부는 가무잡잡했다. 천천히 걷는 걸음걸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왼쪽 다리가 약간 짧아 저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빨리 걷다 보면 드러나게 될 절룩거림을 감추기 위해 그는 언제나 천천히 한 걸음씩 신중하게 내디뎠다. 빨리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 절룩거림이 얼마나 눈에 띌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천천히 정성 들여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신중한 동작이 사실은 더 시선을 끌었다. 신중한 걸음이 ‘왜?’라는 질문을 불러일으켜, 결국 왼쪽 다리가 짧다는 사실까지 파악하게 만들었다. 본인은 그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차피 알게 되더라도 신중하게 관찰한 후 깨달아주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단 몇 분간의 주의 깊은 관찰이나 관심도 기울이지 않은 누군가에게 ‘병신’이라고 단정 지어지는 건 아무래도 참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최소한 몇 분간 그의 걸음걸음을 주의 깊게 바라본 사람이라면 절대 쉽게 ‘병신’이라고 지껄이지 못하고, 한 번쯤 그 안에 담긴 사연을 생각해 보게 되고 입을 다물게 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가끔 혼자 와서 바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으면 카페 주인이 슬쩍 자기 얘기를 던지곤 했다. 젊은 시절 한때 수도자가 되겠다고 남부 독일이던가, 유럽의 작은 수도원에 들어간 적이 있다고 했다. 무슨 사연인지 지금은 땅속 같이 어두컴컴한 이 카페에 틀어박혀 그가 한때 믿었을 신과도, 그리고 세상과도 담을 쌓고 살아가고 있었다.
일찍 퇴근하고 들이닥친 탓에 카페 안은 아직 영업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단골인 내게 카페 주인은 선선히 문을 열어 주었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구석진 테이블 하나를 치워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냉장고에서 차가운 칼스버그 한 병을 내주었다.
녹색 병의 칼스버그를 주로 마시게 된 건 아내와 결혼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독일로 심리학 콘퍼런스 참석차 가게 되었을 때부터다. 독일에 간 김에 유럽 몇 나라를 돌아보고 오자며 아내와 함께 갔었다. 덴마크에서 마침 길을 헤매느라 한참을 걸은 후 들이켰던 칼스버그의 시원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목구멍을 타고 가슴까지 시원하게 흘러내려가던 그 짜릿한 맛이 강한 인상을 남긴 이유도 있었지만, 한 모금 마신 뒤 ‘Probably the best beer in the world’라는 문구를 보고 아내와 한바탕 웃어젖히며 칼스버그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King of the beers’라는 문구를 내세운 버드와이저의 오만함에 대비되면서 소박하고 진솔한 자신감에 반했다고 할까?
아내와의 결혼을 결정할 때까지도 아내가 정말 최선의 선택일까, 자신이 없었다.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나의 그녀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보내지 못했을 때였으니까. 그런데 덴마크의 한 작은 술집에서 내 가슴속까지 시원케 해준 칼스버그가 아내에 대한 사랑에 불을 붙였다. 수줍게 웃고 있는 아내가 내게 ‘Probably the best wife in the world’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 역시 늘 마시는 칼스버그처럼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익숙하고 특별히 나무랄 데 없다. 같은 과 후배였던 아내는 돌아오지 않는 그녀 때문에 방황하던 나를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오랫동안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바람 부는 대로 떠다닐 것만 같던 내 마음이 마침내 닻을 내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을 때도 아내는 같은 학교를 지원해 내 곁을 지켜 주었다. 결혼을 하기는커녕 서로의 미래에 대해 일언반구 한 적 없는 나를 따라 먼 유학길에 동행해 준 아내였다. 외롭고 힘든 유학 생활에서 아내는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솔직히 아내가 곁에서 조용히 돕지 않았다면, 나는 학위를 받지 못하고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돌아온 뒤 아내에게 엄청난 빚을 진 기분이었다. 주위에서는 왜 아직도 식을 올리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고, 내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아내에게 청혼하기 전날 세훈과 술을 마셨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양주에 맥주를 섞어 폭탄주까지 만들어 마셨다. 그저 취하고 싶어, 취하기 위해 마신 술이었다.
다음 날 저녁 아내와의 약속 시간에 나갈 때도 내 몸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깨질 듯 아픈 머리를 제대로 꼿꼿이 들고 있지도 못하던 나는 아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썰렁하게 청혼의 말을 던졌다.
결혼, 하자.
아내는 아무 말 없이, 금방이라도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을 것 같은 나를 부축해 카페를 나와 해장국 집으로 데려갔다. 해장국 한 그릇을 시켜 내 입에 떠 넣어주는 내내 아내는 한 마디도 없었다. 머리가 빙빙 돌며 어지러운 가운데 아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본 것 같기도 했지만, 제정신 상태가 아니었기에 기억을 확신할 수는 없다. 아내와 나는 그렇게 결혼했다.
카페는 어느덧 정돈이 되었고 내가 칼스버그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는 찰나였다. 남녀 커플 한 쌍이 들어와 내가 앉은 테이블과 대각선 방향에 있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칼스버그 한 병을 다 마셨지만 세훈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땅 속 같이 어두컴컴한 카페는 좁아서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네 개와 의자 여섯 개가 놓여 있는 바가 전부다. 주인은 애당초부터 많은 손님을 받고 돈을 버는 데는 뜻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벽에는 흑백으로 된 풍경 사진들이 액자에 걸려 있는데, 간혹 인물이 들어 있는 사진도 있었다. 카페 주인이 여행하며 취미로 찍었으리라 짐작되는 사진들은 여러 곳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유럽의 몇 개 도시 사진은 도시 이름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따라 세훈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었고 불쑥 전화해 나와 달라 했으니 기다리는 게 당연한 일인데, 아직도 머릿속이 시끄럽고 진정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예주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부러 사진에 관심 있는 듯 사진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대부분은 풍경 사진인데, 간혹 인물이 등장하는 사진들도 자세히 보니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진은 없었다. 모자로 얼굴이 반 이상 가려져 있거나, 뒷모습이거나, 그림자만 등장하거나, 불쑥 손 하나만 끼어든 사진도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인물이 여자라는 것, 그리고 그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도 없이 드나들며 술을 마셨지만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리워한다는 것. ‘놈’의 주인은 그걸 알고 있다.
다리가 불편한 주인을 굳이 부르지 않고 주인이 서 있는 바로 걸어가 버드와이저 한 병을 시켰다. 버드와이저란 말에 주인이 얼굴을 들어 내 얼굴을 잠시 살폈다. 내 삶에 무언가 파동이 일고 있음을 감지한 것이다. 거품과 함께 좀 더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간다, 고 생각하면 착각일까? 맛에 민감한 미식가도 아니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늘 마시던 칼스버그조차 가려내지 못할 것이다. 맛과 향과 거품의 감촉 모두가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이미지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그저 늘 마시던 칼스버그가 아니란 점에서 내 코와 혀와 목구멍이 떨리며 흥분되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뭔가 변화가 필요해.
멍하게 있는 내 눈앞에 무언가 왔다 갔다 한다 싶어 정신을 차려보니, 세훈이 어느샌가 내 앞자리에 앉아서 오른손을 내 눈앞에 흔들어 대고 있었다.
웬 똥폼을 잡고 계셔?
세훈의 목소리가 좀 컸는지 대각선 방향의 남녀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다음 화에 계속)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의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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