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가르니크 효과
얌마, 목소리 좀 낮춰. 신부 새끼가 말투가 그래 갖고 성도들이 모이겠냐?
타박을 주곤 있지만 세훈이 30년 지기인 내 앞에서만 그런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보통 나를 만날 때는 사복 차림으로 나오던 세훈이 오늘은 로만 칼라에 검정 클러지 셔츠를 입고 있는 걸로 보아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급하게 나온 모양이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미사에 참석해 본 적도 없고, 세훈이 시무하는 성당에 들어가 본 적도 없어, 독신의 정결을 상징하는 흰색 로만 칼라를 착용하고 있는 세훈의 모습이 아직 낯설었다. 어쨌거나 세훈의 하얀 피부와 오뚝한 콧날이 하얀 로만 칼라와 잘 어울려 영화 속에서 보던 천주교 사제의 모습 같기는 했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어린 시절 세훈의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어, 하느님과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세속에서 죽었다는 의미인 검은색의 긴 수단을 입은 세훈의 모습이 역시 잘 그려지지 않았다.
왜 갑자기 버드야? 지혜 씨는 잘 있고?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 세훈이 아내의 안부부터 먼저 물었다.
잘 있겠지. 독실한 크리스천 아니냐? 맬 교회로 출근하는데 잘 돌봐주시겠지.
나도 모르게 애꿎은 아내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싸웠냐?
내가 마시던 버드와이저를 당겨 한 모금 마시며 세훈이 물었다.
중학교 때 어른들 몰래 처음으로 술을 마신 것도 세훈과 함께였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신 적은 평생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때마다 세훈이 함께 있었다. 주량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세훈과 함께 있을 때 외에는 과음하는 일이 없고, 주량이 나보다 훨씬 센 세훈은 내 앞에서 말은 ‘인마 전마’ 해도 신부가 된 이후로는 맥주 한두 병 이상 과음하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세훈의 로만 칼라가 아직은 낯설지만, 세훈이야말로 가톨릭 사제로 타고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가톨릭 신도 아니면 고해성사 안 받아 주냐?
내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대꾸하지 않는 세훈이지만 이미 귀를 기울여 들을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정 클러지 셔츠 때문인지 정말 고해성사라도 하기 위해 앉아 있는 죄인처럼 느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치 이미 엄청난 죄를 지은 것처럼, 세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요즘 내 맘을 시끄럽게 하는 여자애가 하나 있다. 잔잔하던 호수에 작은 돌멩이 하나 던져진 것처럼…….
버드와이저 병에 붙은 상표를 손톱으로 신경질적으로 긁어내며 말을 꺼냈다. 잠시 눈을 들어 세훈을 보니 돌멩이를 던져도 파문 하나 일지 않을 잔잔한 호수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예주가 갑자기 내 방에 불쑥 찾아와 상담을 해달라고 조른 일과 어려서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해 남자를 멀리 하며 여자를 사귀게 된 사연 등을 두서없이 얘기했다. 세훈이라면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가 절대 없겠지만, 내담자와의 상담 내용을 밖에서 얘기해 프로페셔널 스탠더드를 어기는 것에 대한 자책감에 예주의 이름만은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색하게도 예주의 외모에 대해 장황하게 묘사하면서 나도 모르게 잔뜩 들뜨고 말았다.
버드와이저 병에 붙어 있던 상표는 모두 지저분한 쓰레기가 되어 테이블 위에 쌓였다. 주인을 불러 버드와이저 한 병을 더 시키자 주인이 차가운 새 병을 갖다 주며 내 테이블 위를 한 번 훔쳐 주었다.
오늘 걔가 상담을 펑크 냈는데 꼭 바람맞은 기분이야. 걱정도 되고. 다신 안 나타날까 두렵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다시 새 버드와이저 병의 상표를 손톱으로 긁어 뜯었다.
20년 전의 너의 여신이 다시 재림하신 건 아니냐?
세훈이 농담처럼 질문을 던지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는 폼이 본격적으로 나를 관찰하려는 모양이다.
아내와 결혼을 결심하며 폭탄주를 들이붓던 그 밤 이후 세훈이나 나나 그녀 얘기를 꺼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세훈의 질문에 갑자기 금기를 깨뜨린 것처럼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예주가 정말 그녀와 닮았나. 머리가 긴 여대생은 세상에 널려 있다. 아픈 과거에도 불구하고 밝게 웃는 장난기 많은 예주와 굳게 다문 입술을 잘 열지 않고 늘 어두워 보였던 그녀와는 별로 닮은 구석이 없다. 솔직히 이젠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 해도 너무 아련하기만 하다. 오랜 세월에 닳고 닳은 내 기억을 신뢰할 수 없기도 하지만, 기억을 제대로 복원한다 해도 내가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만남이 짧았던 탓도 있지만 굳게 다문 그녀의 입술 뒤에 숨어 있는 그녀의 어두운 영혼을 훔쳐보면서 내 맘껏 상상하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투사해 나만의 그녀를 만들어 온 탓도 있었다. 길고 짙은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우고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그녀는 그야말로 하얀 도화지였다. 내 질문에 단 한 번도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았던 그녀는 내가 나만의 그녀를 그려주기 바랐는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텅 빈 그녀의 얼굴은 무엇이든 꿈꿀 수 있고,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얼굴이자 한계가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분명 자기 자신을 나의 온갖 상상을 자극하는 물건, 곧 페티시(Fetish)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나 스스로 그 안에 생기를 불어넣어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페티시.
이 모든 생각이 다 부질없다. 난 그녀를 모른다. 내가 아는 그녀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미완성 과제에 대한 기억이 완성 과제에 대한 기억보다 더 강하게 남는다.’
자이가르니크 효과(Zeigarnik Effect)라고 간단히 명명해 버리면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간단히 마음 접을 수 있을 텐데……. 열중하던 것을 도중에 멈추게 되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남아있는 일을 하려는 동기가 강하게 작용해 정신적 강박이 형성된다. 미련이 남고, 결국 그것이 인상 깊게 뇌리에 박히게 된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오래 기억되는 것도 바로 자이가르니크 효과 때문이다. 그녀의 경우 그 흔한 이별의 절차도 없이, 아니 헤어질 거라는 털끝만큼의 암시도 주지 않고 정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자이가르니크가 얘기했던 미완성 과제로 인한 심리적 긴장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설명은 이렇게 간단한데. 그녀에 대한 내 그리움을 어떻게 미완성 과제로 인한 심리적 긴장이라고 간단히 이름 붙일 수 있겠는가.
잘 떨어지지 않는 상표의 남은 조각을 발작적으로 긁다가 기어이 병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조금 남아있던 버드와이저가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예감이 좋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감정의 소용돌이 없이 모든 것이 통제 하에 잘 정돈되고 절제되어 있었는데, 나답지 않은 짜증이다. 예주를 내 삶에서 제거하자고 하지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하고 외칠수록 머릿속엔 코끼리만 가득 차게 되는 법. 어느새 난 다음 주에 과연 예주가 나타날까, 안 나타날까, 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 가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바라보는 세훈의 눈빛에는 여전히 동요가 전혀 없었다. 세훈이 입고 있는 클러지 셔츠의 검은색이 상징하듯 내가 아는 세훈은 이미 죽고 유스티노 신부만 내 앞에 남아 있었다.
이주한! 한지혜 잘해줘라. 두 지혜는 잃었지만.
세훈이 농담이라고 던진 말이 그를 쓸쓸해 보이게 했다.
새끼, 실없기는. 잘 가라.
한지혜는 아내 이름이고, 두 지혜는 세훈이 열여섯에 좋아했던 이지혜를 제 딴에 농담으로 표현해 부른 것이다. 세훈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고, 세훈을 유스티노 신부로 만든 이가 바로 이지혜다. 내 또래 친구들을 통틀어 모든 게 가장 빨랐던 세훈. 덕분에 나는 술도 담배도 세훈에게 배웠고, 그의 연애담을 들으며 가슴 설레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며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이지혜와의 사랑이 점점 진지해지더니 급기야 세훈은 자신의 순정과 동정을 바치기에 이르렀다. 이지혜와의 사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세훈을 충격에 빠뜨린 건 이지혜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 세훈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건 이지혜가 자신의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훈을 이용했다고 자신의 입술로 고백한 것이었다. 나이 차이든 뭐든 사랑으로 다 극복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세훈은 이지혜의 그 한 마디에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침잠하고 말았다.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깊은 바닷속을 부유하던 세훈이 몇 달 만에 불쑥 던진 첫마디가 바로 “나 신부 될 거다.”였다. 어쩌면 이지혜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고 상상조차 못 했던, 세훈 안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던 세훈의 본모습을 끌어내준 장본인인지 모른다. 그럴 의도나 계획은 전혀 없었겠지만.
금기 시 되던 일들이 하룻저녁에 모두 깨져버렸다. 그녀가 우리 화제에 언급되지 않은 게 10년이라면 이지혜란 이름을 세훈의 입에서 들은 건 20년도 더 된 일이다. 이제 50대가 되었을 여인의 이름을 ‘이지혜’하고 부르는 것도 사실 뭣하다.
세훈을 보내고 뜨거워진 머리를 식힐 겸 조금 걸었다. 그녀와 함께 걸은 적 있던 그 거리를. 내가 그리워하는 이는 그녀인가, 아니면 예주인가.
(다음 화에 계속)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의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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