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었다
그녀와 만났던 석 달의 시간은 하필 화염병과 최루탄이 분주히 오가던 시기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지 열흘 정도 지났을까. 나보다 겨우 한 살 어린 새내기 대학생이 시위 도중 달아나다 경찰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백주에 경찰이 학생을 때려죽였다’며 바로 다음날 만 명의 학생들이 Y대에 모이고, 명동은 다시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2,3일에 한 명씩 전국 각지에서 젊은 청춘들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목숨을 던졌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 같이 던지며 제발 들어달라고 외치는 젊음들이 스러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거리로 뛰쳐나가는 대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들을 외면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뛰쳐나가지도 못한 채 불편하고 모욕적인 일상생활을 해나갔다.
평생 그 해 봄만큼 가슴이 뜨거워 본 적은 다시없었다. 하지만 난 그 어떤 시위 대열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대학생들처럼 수업을 듣고 열심히 짬을 내어 그녀를 만났다. 불심검문에서 걸릴 소지가 있는 ‘유물론’ 유의 책이나 ‘말’ 같은 잡지를 가방에서 빼버리고 학회나 일부 운동권 학생들의 모임에도 일절 참석하지 않자, 몇몇 선배들에게 겁쟁이 취급을 받으며 손가락질당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뜨거운 화염병 불길과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 대신 풋풋하고 상쾌한 꽃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방망이질 치는 뜨거운 내 가슴은 죽음과 폭력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라고 자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거리를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보다 더 깊고 어두운 그늘이 그녀에게 드리워져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녀를 떠나보내기 전에는 그 그늘의 깊이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디에선가 또 누군가가 자기 몸에 불을 질렀을지도 모르는 어느 날, 그녀와 난 양쪽으로 작은 소나무들이 가지런히 줄 서 있는 산책길을 조용히 걸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탓인지 청각과 후각 등 시각 이외의 감각들이 활짝 열렸다. 고르게 들고 내쉬는 그녀의 숨소리와 또각또각 가벼운 그녀의 구두 소리가 귓가에 또렷이 들렸다. 향긋한 솔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속도를 늦추고 잠시 눈을 감고 걸었다. 왼쪽 어깨에 살짝 닿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도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 여린 꽃잎 같은 싱그러운 향기.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생명의 에너지를 조용히 빨아들였다.
‘살고 싶다.’
감기조차 걸리지 않던 건강한 몸에, 자신을 죽음의 위협에 내 몰아본 적도 없이 누군가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며 충만한 고요와 평온을 누리고 있던 그 순간에 머리를 스친 생각이 ‘살고 싶다.’라니.
‘살고 싶다.’
다시 한번 강렬하게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삶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기 위해 나는 걸음을 점점 더 늦춰보았지만 도저히 주체할 수 없어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그녀의 두 팔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금방이라도 톡 부러질 것 같은 가녀린 팔.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에 닿자 그녀의 팔을 놓고 그녀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터뜨려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내 안의 모든 힘을 다 끌어내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뜨거운 가슴이 내 가슴을 누르고, 그녀의 뜨거운 숨이 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가슴 한편 조그만 구멍에서는 여전히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물컹한 혀가 느껴졌다. 있는 힘껏 그녀를 빨아들였다. 그녀의 에너지를 빨아들여야만 겨우 살아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살고 싶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법도 한데 눈을 감자 모든 풍경이 사라지고 하얀빛만 충만했다. 굶주린 아기가 살기 위해 엄마 젖을 빨아대듯 그렇게 그녀를 빨아들였다. 그녀의 입술이 터져 피가 맺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걸까? 그녀와 난 길가 보도블록에 걸터앉았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아 주려 하자, 그녀는 얼굴을 피하더니 손수건을 받아 쥐고 직접 닦아냈다. 손수건이 입술에 닿자 그녀는 움찔했다. 그녀는 다 닦은 뒤에도 돌려주지 않고 손수건을 계속 쥐고 있었다.
여린 꽃잎 같은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분명 평생 처음 해본 첫 키스였는데, 부드럽고 달콤하게 어루만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이미 한바탕 폭풍은 휩쓸고 지나갔고 그녀의 입술에는 상처만 남았다. 내 가슴속 찬바람 들던 구멍은 힘껏 빨아들인 그녀의 타액으로 메워진 건지, 바람이 잠잠해지고 폭풍 후의 바다처럼 고요해졌다.
“오늘은 꼭 집에 데려다주고 싶어.”
한결 가까워진 기분에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혼자 갈래.”
그녀는 1초의 재고도 없이 단번에 거절했다. 그녀를 힘껏 빨아들인 후 이젠 그녀가 내 안에, 내가 그녀 안에 있다고 확신했는데 아직도 난 그녀 안의 문을 다 열지 못했던 것일까?
“가자.”
하지만 잠시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내 팔에 팔짱을 끼며 경쾌하게 걸음을 내딛던 그녀의 꿈꾸듯 반짝거리는 눈빛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던 의심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왜 그녀는 단 한 번도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도록 허락하지 않는지 결국 물어보지 못했다.
그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항상 충만했다. 늘 비밀을 간직한 듯 그녀의 모호한 대답에 난 의문을 갖지 않았고, 그 한계 없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사랑했다. 크기도 형체도 알 수 없는 그 무형의 공간에 내가 꿈꾸던 모든 이상의 결정체가 들어있다고 믿었을 뿐. 하지만 그녀는 내 모든 꿈마저 그대로 안은 채, 사라져 버렸다. 그 해 봄은 한여름의 아스팔트처럼 뜨거웠고, 동시에 파충류의 피부처럼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다음 화에 계속)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의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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