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비를 맞아보는 시간
고통만큼 성숙한다고 떠들어대지만 사실은 그만큼 황폐해지고, 무뎌지고, 남루해지는 거다. 더 이상 발그레하게 빛나지 않는 내 피부처럼.
발그레한 핑크빛을 차 안 가득 드리우며 버티는 우산. 차에 타려는데 우산이 접히다 말고 갑자기 활짝 펼쳐지며 빗물을 튕겼다.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진 않았지만, 입술은 이미 일그러졌다. 한때는 손에 든 우산마저 친구 손에 쥐어주고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걷기를 좋아했는데.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언제 이렇게 변한 걸까 생각해 보지만 의심 가는 시점을 점찍을 수 없다. 하루아침에 변한 게 아니니까. 아편에 중독되듯 서서히 마비되고 굳어져 왔을 뿐, 아주 조금씩 황폐해진 거다.
아프기 싫어서 고슴도치처럼 잔뜩 웅크린 채 가시를 세우고 있던 건데, 오히려 웅크릴수록 더 아팠던 것 같다. 바짝 세워 놓은 가시들이 나를 지켜주기는커녕 간혹 다가오는 따스한 손길마저 밀어냈던 것이다.
빗물이 옷과 피부를 천천히 적셔오는 이 시간, 가만히 가시 코트를 벗어본다. 빗물이 스며들며 옷이 달라붙을 때의 감촉과 살갗에 스미는 빗물의 감촉, 그리고 서서히 식었다가 다시 열을 내기도 하는 체온 변화를 느껴 보고 싶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빗물이 요란하지 않게 가만가만히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