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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2미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이사

낯설게 보기 감각

by 윤소희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을 때, 나를 가장 설레게 한 건 내 서재가 될 공간의 창이었다. 넓은 창으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곳이 나를 위한 공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에 살던 집은 낮에도 등을 있는 대로 다 켜야 겨우 어둠을 밀어낼 수 있었기에, 이 창이 가져다줄 환한 가능성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창턱은 폭이 넓고 높이도 딱 적당해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창 벤치 같았다. 푹신한 쿠션이 얹혀 있어 오래 앉아 있어도 엉덩이가 시릴 일은 없었다. 한동안 창턱을 중심으로 작은 꿈의 공간을 꾸몄다. 손님 올 때나 쓰던 임시 테이블에 테이블보를 씌워 작은 책상을 만들고, 독서 모임에서 선물 받은 라탄 스탠드와 일러스트 머그잔을 올려두었다. 또 언젠가 독자가 선물한 내가 쓴 네 권의 책 표지가 담긴 머그잔도 자리를 차지했다. 좁지만 완벽히 나만의 물건들로 채운 이곳은, 내게 있어 작은 디즈니랜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설레는 공간을 마련해 두고도 나는 한 달 동안 그곳에 앉아본 적이 없었다. 변화는 언제나 어렵다. 단 2미터도 안 되는 거리로 옮겨 가는 일마저 내면의 커다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군살이 붙으면 운동은커녕 집 밖으로 한 발 내딛기도 버거워지듯, 익숙함에 안주한 영혼은 새로운 것을 두려워한다. “마지막으로 설렜던 게 언제였지?” 하고 떠올리는 순간, 나는 이미 고인 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WechatIMG7455.jpg 창틀 벤치에 앉아 필사노트를 적고 있다


결국 오늘 새벽, 나는 이사를 감행했다. 책상에서 창가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라탄 스탠드의 불을 켜고 창틀 벤치에 앉아, 필사 노트를 펼쳤다. 차분히 문장들을 옮겨 적는 동안, 어느새 창은 보이지 않았다. 창을 등지고 앉았기 때문이다. 대신 늘 내가 앉아 있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정리되지 않은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서재의 새벽 공기는 차갑고도 명징했다. 나는 코로 공기를 들이마시는 대신, 엉덩이와 허리로 공기를 감각했다. 창은 외부의 빛을 들이는 동시에 내부의 온기를 내어주는 공간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바깥을 향해 열려 있지만, 동시에 안쪽을 내어주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창의 본질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며, 성숙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속 문장이 떠올랐다. 겨우 2미터를 옮겨온 것뿐이지만, 낯선 공간에 앉으니 나 자신이 선명해진다.


나는 매년 이사를 해왔다. 돌아보니, 그동안 몸과 물건만 이동했을 뿐, 마음은 그대로 한 곳에 붙박인 채였다. 마음이 고여 있으니,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감각도 무뎌질 수밖에. 창틀 벤치에 앉아 꼼짝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살살 달래 본다. 낯선 곳, 서먹한 관계, 생경한 일들에 조금 더 과감히 발을 뻗어 보자고.


2025년의 일력이 열 장도 더 떨어져 나간 지금에서야, 내 삶에 비로소 새해가 밝았다.



IMG_4496.jpeg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5년 1월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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