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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y 15. 2020

책으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책 속을 헤매며

헐레벌떡 달려 들어가 숨을 깊이 들이쉰다. 호흡곤란으로 한동안 부족했던 산소가 공급되자 비로소 머리가 뻥 뚫린다. 한참 깊은숨을 몰아 쉬고 나니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점점 제 박자를 찾아간다. 천천히 조금 더 걸어 모퉁이를 돈다.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책장들 사이에 잠시 주저앉아 숨을 고른다. 이제야 살 것 같다. 갓 인쇄해 낸 신선한 잉크 냄새가 긴장되어 있던 내 근육을 서서히 이완시킨다. 엄마 자궁 안으로 돌아와 몸을 웅크린 채 안도하는 태아처럼 그곳에서 난 위로를 받곤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멍들고 상처 입었을 때, 차가운 시선에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 외로울 때, 숨을 곳이 간절히 필요할 때마다 서점에 간다. 손끝으로 꽂혀 있는 책들을 주욱 어루만지며 책장을 따라 걷는다. '찌릿'하며 손끝을 자극하는 책을 한 권 뽑아 펼쳐진 책장 사이에 코를 박고 다시 한번 큰 숨을 들이쉰다. 수목원에 들어가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나는 갓 나온 책 속에 코를 박고 싱싱한 잉크 냄새를 마신다.  


책을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이 주는 감촉과 무게감이 먼지처럼 날아다니려는 내 삶을 지그시 눌러 주기도 하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소리를 내어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귓가에 나를 인도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도 서점으로 달려가 책에게서 위로를 받았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서점에 가 책을 통해 내 안에 남겨진 무언가를 보물찾기 하듯 찾아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도 책 안에서 사랑의 지도를 더듬었으며, 절망의 순간에도 책 속에서 희망의 날갯짓을 찾았다.  


여기저기서 마주쳤던 서점 및 도서관


가끔은 어쩌면 책으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인간으로 잘못 태어났는지도 모른다는 싱거운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책은 수십만 권 수백만 권에 둘러싸여 있어도 평온하고 행복하기만 한데, 사람들 사이에서 왜 나는 이리 자주 아프고 외로운가. 책은 다른 종인 인간마저 가리지 않고 큰 품으로 품어주는데, 사람들은 왜 같은 종인 사람에게 날과 가시를 잔뜩 세우는 걸까. 


삶의 밑바닥에서 엉덩방아를 찧은 날이나 엉엉 울다 일어난 날에도 어김없이 서점을 찾는다. 서점을 찾지 못하면 어딘가에 꽂혀 있을 책 한 권이라도 찾아들고 그 속에 얼굴을 파묻는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그 순간에도 책만은 변함없이 큰 품으로 나를 받아주고, 또 품어 준다. 책만은 나 역시 날과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는 인간임을 다 알면서도 괜찮다고 다독여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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