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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한여름에도 상하지 않는 사랑

상하이 시자오빈관 (西郊宾馆)

by 윤소희

숨막히게 더운 날이었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몰고 온 무거운 습기 탓에, 가만히 있어도 열기가 몸을 휘감았다. 남편이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다. 말없이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인데, 마치 계절을 거슬러 튀어나온 난로 같았다. 이 여름에, 더운 기운을 뿜어내는 우리는 서로를 지치게 하는 존재 같았다.


더위에 많은 것들이 쉽게 상한다. 복숭아나 바나나는 금세 무르고, 잘라놓은 파인애플은 한나절을 넘기기 전에 변색되고 물이 생긴다. 무더위에 내 마음도 무른 복숭아처럼 금세 질척이며 흘러내렸다. 사랑조차 눅눅하게 무르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우리 나가서 좀 걸을까?

더위 탓에 핀잔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남편은 별말 없이 따라 나섰다. 목적지는 시자오빈관. 사진 속 잔디밭과 나무 그늘이 청량해 보여, 별 생각 없이 정한 곳이었다. 상하이에서 가장 큰 정원 별장식 국빈관이라더니, 입구에서 본관까지 걷는데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초록이 짙게 물든 풍경이 펼쳐졌고, 작은 폭포와 연못, 이름 모를 식물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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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시자오빈관 (西郊宾馆)


눈에 보이는 모든 풍광이 맑고 시원했지만, 그 안을 걷고 있는 우리가 느끼는 체감온도까지 낮아진 건 아니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코끝과 이마에 땀이 맺혔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포즈를 취하는 연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부부도 있을까. 함께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는 그들도 어떤 날은 우리처럼 무더울까.


작은 폭포가 보이는 연못가에 나란히 앉았다. 물 위에 구름의 그림자가 흐르고 있었다. 말없이 앉아있던 그가 조용히 물병을 내게 건넸고, 나는 입을 대고 몇 모금 마셨다. 물병을 돌려주려 고개를 들었을 때, 그가 나를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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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시자오빈관 (西郊宾馆)


말도 없이 찍으면 어떡해? 방심하면 못생긴 얼굴 되잖아.

그는 웃었다. 방심한 얼굴, 꾸미지 않은 표정이 더 좋다고 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 한 구석이 부드러워졌다. 나 역시 그의 정리된 얼굴보다, 문득 흐트러진 순간의 표정을 더 좋아한다. 그에게 물병을 건네자, 겨드랑이 사이로 아주 약한 바람이 스쳤다. 한참 침묵으로 걸었던 우리 사이에 미약하지만 바람 한 줄기가 들어왔다. 걷는 동안 흘렸던 땀이 바람에 날아가자, 그 자리가 시원했다.


과일을 너무 꼭 싸매두면 숨이 막혀 썩는다. 포장을 벗기고 바람을 통하게 해야 오래 간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숨구멍을 조금씩 열어두는 것. 결혼은 그런 틈으로 유지되는 게 아닐까. 완벽한 남편, 흠 없는 아내를 바라며 서로를 조이기 시작하면, 사랑은 숨이 막혀 무르기 시작한다. 오히려 느슨함과 작은 방심이 관계를 오래도록 신선하게 만든다. 여름철 복숭아처럼. 때때로 방심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게 좋다. 사진 찍힐 때처럼 정제된 얼굴보다, 문득 흘러나온 무방비한 표정을 서로 편히 내어 보이는 일, 그것이야말로 한여름에도 상하지 않는 사랑의 비밀.



상하이의 사랑법 28 (1).png 윤소희 칼럼_상하이의 사랑법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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