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싱궈빈관 (兴国宾馆)
젊은 날 나는 품위 있는 손님이 되는 법도, 손님을 환대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군 복무 중이던 연인을 면회하던 날, 나는 그가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내 편지들을 차곡차곡 회수해 가방에 넣었다. 잘 챙겨 두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모두 없앨 요량이었다. 종이에 적힌 마음이 어느 순간 내게 짐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편지 뭉치는 어깨를 낯설게 짓눌렀고, 종이 냄새가 먼저 이별의 기척을 풍겼다. 며칠 뒤, 전화기 너머로 나는 몇 마디 말로 그와의 관계를 끝냈다. 기다림의 날들이 아무 의미 없었던 것처럼, 너무도 손쉽게 잘라내듯 돌아섰다. 떠날 자유는 있었어도, 함께한 날들을 품지 못한 채 떠난 길은 어딘가 모르게 서늘했다. 지금도 가장 뼈아픈 것은 이별 그 자체가 아니라, 이별을 다루는 내 서툰 방식이다.
싱궈빈관 정문을 들어서자, 도시의 소음은 담장 밖에서 멈춰 섰다. 좁은 길이 낯선 초대장처럼 내 앞에 펼쳐졌고, 키 큰 나무들이 잎사귀로 하늘을 가리며 그 길을 은밀하게 감싸고 있었다.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초록빛의 파문을 만들고, 햇살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바닥 위에 부서졌다. 유럽식 별장 같은 건물들이 사이사이 고개를 내밀며 오랜 세월을 증언하는 듯 서 있었다. 담장 너머의 시간은 분주히 달려가고 있었지만, 안쪽의 시간은 한결 느리게 흘렀다. 그 길 위에서는 사랑마저 서로의 주인이 되는 일이 아니라, 오래 머무는 손님이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싱궈빈관의 역사는 내 연애사보다 훨씬 더 복잡했지만, 고요하고 단단했다. 1920년대 외국 기업 간부의 별장으로 시작해, 전쟁과 혁명의 격랑 속에서 수없이 주인이 바뀌었다. 때로는 초대소로, 때로는 국빈 호텔로 이름을 달리했지만, 정원은 언제나 묵묵히 손님을 맞았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만남을, 누군가는 이곳에서 이별을 겪었다. 머무는 이들이든 떠나는 이들이든, 정원은 모두를 품위 있게 맞이하고 배웅했다. 주인이 바뀌어도 이어진 것은 환대의 방식이었다.
천천히 정원 길을 걸었다. 오래된 나무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흘러내린 햇살이 그림자를 부드럽게 엮어냈다. 겹겹이 내려앉은 무늬가 길 위에 은은한 문양을 새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빛과 어둠이 번갈아 발끝을 스쳤다. 마치 머무름과 떠남이 서로를 살며시 이어주는 듯했다. 젊은 시절 나는 이런 이별의 풍경을 알지 못했다. 떠나는 순간에도 은은한 숨결이 남아 있는 방식. 사랑도, 이별도 이처럼 다정할 수 있는 온기.
정원은 오늘도 문을 열어둔다. 햇살과 그림자가 섞여드는 좁은 길은 머무는 자와 떠나는 자 모두를 환대한다. 나무 사이 좁은 길을 함께 걷다가, 때로는 정중히 작별을 고할 수 있는 사랑. 떠난 후에도 다시 돌아오고 싶게 만드는 다정함. 발걸음이 멀어진 후에도 다녀간 숨결이 풍경이 되어 오래도록 빛과 그림자처럼 정원에 남아 있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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