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1933 라오창팡 (老场坊)
미뤄둔 울음을 토해내듯 가을비가 내렸다. 하이룬루 역에서 걸어 나와 젖은 골목을 걸었다. 스카프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가 마치 오래된 감정의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눈앞에 나타난 1933 라오창팡은 회색의 근육을 부풀린 채, 거대한 짐승처럼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콘크리트 벽면은 축축했고, 계단과 복도는 끝없는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경사로와 다리, 서로 교차하는 통로가 눈과 마음을 어지럽혔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방향감각을 잃고 비틀거렸다. 과거의 상처를 밟고 걷는 듯, 발끝이 허공을 디뎠다.
라오창팡은 본래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도살장이었다. 1933년, 영국인 건축가가 위생적 도축을 위해 설계한 건물. 그로테스크한 곡선, 교차하는 통로, 바람길, 좁은 다리. 생과 사의 경계를 치밀하게 계산해 설계한 공간이었다. 하루 수천 마리의 소와 돼지가 그 길을 지나 울부짖으며 사라졌다. 지금은 같은 동선 위로 웨딩드레스가 흩날리고, 고기 냄새가 배어 있던 환풍구 위에 조명이 켜진다. 도살의 구조는 그대로인데, 그 위에서 인간은 이제 사랑을 연습한다. 잔혹했던 공간이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배경이 되었다.
그 불협화음 속에서 나는 한때 지우려 애썼던 말 한마디를 떠올렸다.
너 같은 여자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이별의 순간에 던져진 그 문장은 오랜 시간 내 안에서 돌처럼 굳어 있었다. 사랑의 잔혹함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그러나 삶 속에서 그 잔인성은 숫자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로 남는다. 누군가는 사랑을 구실 삼아 주먹을 휘두르고, 누군가는 잔인한 말을 던지며, 누군가는 그 폭력 속에서 다시 사랑을 믿으려 애쓴다. 사랑의 이름으로 가해진 상처는, 통계로 기록되지 않는 개인의 비명으로 남는다. 나 역시 그 말의 그림자 아래에서 오래도록 사랑을 두려움의 얼굴로 기억했다.
“사랑은 둘 중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는 위험한 열정이다. 이성과 비이성은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이다.”
데이비드 버스 <위험한 열정 질투> 중
라오창팡의 벽은 그 말을 증명하듯 굳건히 서 있었다. 폐허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 얼굴을 얻을 뿐이다. 죽음의 냄새가 맴돌던 통로 위에서 신랑 신부의 웃음이 번진다. 철제 난간에 꽃장식이 걸리고, 콘크리트 벽에 웨딩사진이 투사된다. 고통의 자리에 온기가 피어나고, 파괴의 기억 위에 사랑이 싹튼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 우리가 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나는 젖은 골목을 걸었다. 건물 뒤편에서 과거의 메아리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희망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사랑은, 결국 폐허를 견디는 일, 무너진 자리에 다시 발을 딛는 일이다. 소들의 울음과 신랑 신부의 웃음이 뒤섞인 이 도시의 공기처럼, 사랑도 상처와 화해가 공존하는 하나의 구조물이 아닐까.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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