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빈장삼림공원(滨江深林公园)
바람이 먼저 빛을 흔들었다. 저 멀리 분홍빛 안개 사이를 헤엄치듯 오가는 사람들의 웃음이 얇게 번졌다. 흰 모자를 맞춰 쓴 이들이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는 모습은 들판 위에 떠오른 작은 행성 같았다. 바람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가녀린 꽃대가 미세하게 기울었고, 그 떨림 속에 분홍빛 파문이 일었다. 길이라 부를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누군가가 밟고 지나간 흔적이 쓰러진 꽃대를 따라 비뚜름하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구름이 해를 가렸다. 조금 전까지 들판을 충만하게 채웠던 빛은 순식간에 꺼졌고, 멀리서는 분홍 구름 같던 핑크뮬리가 가까이에서는 잿빛 실타래처럼 힘없이 내려앉아 마른 숨을 내쉬었다. 꽃향기를 기대했던 코끝에는 건초 냄새만 옅게 배어들었다. 한순간 현란했던 색은 조명이 꺼진 무대처럼 조용히 가라앉았다. 아름다움이란, 때로는 거리라는 조건을 전제한다.
그 풍경 앞에서 오래전 한 얼굴이 떠올랐다. 스무 살 무렵, 나는 큰 키에 희고 단정한 피부를 가진 남자에게 마음을 기울였다. 그는 입보다 눈이 먼저 웃는 사람이었다. 웃음이 번질 때면 눈가에 빛이 한 겹 내려앉아 주위를 은근히 밝혔고, 나는 그 빛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흠을 찾기 어려울 만큼 단정했고, 모든 것이 정돈된 사람이었다. 그 질서 정연함의 깊은 평온 속에 오히려 숨 막히는 순간이 있었다. 그와 함께한 날이면 이상하게도 내 안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의 단정함은 때로 너무 완벽한 평면처럼 느껴졌다.
“내가 너를 제일 미워하는 까닭은, 네가 나를 끌어당기기만 하지, 나를 붙들어 둘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이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멀리서 바라보면 황홀했던 빛이 가까이 갈수록 흩어지는 핑크뮬리처럼, 그 만남은 분명 설렜으나 그 감정을 지속할 힘은 없었다. 사랑이란 어쩌면 손끝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비워진 틈 위에서만 유지되는 열인지도 모른다. 끌림은 가까워지는 순간 방향을 잃고, 열정은 손에 쥐는 순간 빛을 지운다. 어린 나는 그 사실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바람이 다시 들판을 흔들었다. 분홍빛 결들이 일제히 몸을 세우고, 기울고, 또다시 일어섰다. 햇살은 그 위에 잠시 머물다 이내 흩어졌다. 나는 들판을 벗어나 한참을 걸었다. 멀어질수록 분홍빛은 흐르는 안개처럼 아련해졌고, 그러자 오히려 아름다움의 전모가 드러났다. 가까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파동과 리듬, 빛의 결들이 거리를 두자 형태를 갖추며 선명해졌다.
그해의 내 어린 사랑도 결국 그런 풍경이었을 것이다. 붙잡지 못했기에 아름다웠고, 멀어진 뒤에야 비로소 그 온도가 또렷해지는. 가을의 분홍빛 착시처럼 한때 나를 물들인 끌림. 가까울수록 흐려지고, 멀어질수록 선명해지는 감정들. 계절은 이미 지나갔으나, 그 빛은 마음 한쪽에 사라지지 않는 떨림으로 남아 있다. 그 떨림은 여전히 분홍빛이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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