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성에 대한 환상
단편소설: <스마트한 당신만 읽으세요> 2화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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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당신에게 주문을 걸어 드리죠. 당신은 이 글을 내려놓고 운명에 대해 잠시 잊을 수 있습니다. 아니 잠시 잊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문득 TV 화면 속에서, 또 신문 기사를 읽던 중 뜬금없이, 길을 가다가 광고판이나 벽에 있는 낙서 중 갑자기, 최근 읽고 있는 책 내용 일부에서 돋보기를 들이대듯 도드라지게, ‘운명’이란 단어를 지속적으로 만나게 될 겁니다. 온 우주가 당신에게 뭔가를 암시하는 그때 가서 내 말에 다시 귀를 기울여준대도 하나도 서운하지 않아요. 당신은 선택받은 소수의 스마트하고 신중한 독자니까.
당신에게 소개할 김과 박 역시 지능으로 보나 학교 때 성적으로 보나 상위 1 퍼센트, 아니 상위 0.1% 안에 드는 스마트하고 신중한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세계 3위 안에 드는 전략 컨설팅 회사의 한국 지부에서 일하고 있는 유능한 컨설턴트죠.
컨설팅이라고 하면 광고 컨설팅, 홍보 컨설팅, 식품 컨설팅에 이젠 부동산 중개소까지 컨설팅이란 말을 붙이니, 뭐 그렇고 그런 컨설팅인가 보다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컨설팅 서비스의 도움을 빼놓고는 현대 자본주의의 번창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개인의 한계를 넘어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성장하는 사회 속에 초대형화된 기업들이 전문가의 축적된 지식과 분석능력을 빌리지 않고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졌죠.
김과 박이 몸담고 있는 컨설팅 회사도 컨설턴트 1인당 매출이 미화 50만 달러가 웃도는 효율적인 업무 수행으로 정평이 나있는 회사입니다. 이런 컨설팅 회사에서 컨설턴트라는 명함을 받기 위해선 최소한 미국에서 10위 안에 드는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쳐야 한다는 건 당연한 얘기죠.
김은 워튼(Wharton: 미 펜실베이니아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하고 돌아와 컨설팅 회사에 입사한 지 이제 막 두 달이 된 신입사원입니다. 막 서른이 된 김은 동글동글하고 순박한 얼굴이라 첫인상은 약간 어리숙해 보입니다. 하지만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노트북 앞에 앉아 복잡한 엑셀 모델을 만들어 재무자료들을 척척 분석해 내는 김을 본다면 당신도 아마 혀를 내두를 겁니다. 김은 꼼꼼하고 논리적인 성격에 방대한 재무자료들을 다루는 데 전혀 겁을 내지 않고, 오히려 숫자를 가지고 논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죠. 160센티가 조금 넘는 작은 키로 여자 친구에게 두 번이나 차이긴 했지만, 자료 분석만큼은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은 켈로그 (Kellogg: 미 노스웨스턴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한 후 컨설팅 회사에 입사해 지난달에 이사로 승진했습니다. 팀장으로 일할 때부터 팀원들의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대체로 맡겨 두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간혹 간섭할 능력이 없어 그냥 맡기는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나온 적 있지만, 뭐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박은 180이 넘는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 세련된 매너로 회사 내 여직원들과 여성 클라이언트들 대상으로 인기투표를 한다면 당연히 1위를 차지할 겁니다. 거기다 말재주가 좋고 사람들과 친화하는 능력이 뛰어나 클라이언트와 1대 1로 만나 술 한 잔 하며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는 남다른 재주가 있죠. 프로젝트를 롤오버(roll-over)시켜 새로운 프로젝트로 이어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 파트너들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이제 막 이사 직함을 달고 매니지먼트 그룹에 들어섰으니, 최근 들어 박은 특별히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박은 김처럼 사람보다 숫자를 믿는 타입의 인간을 좋아하진 않지만, 엑셀로 척척 분석 모델을 만들어 재무 자료를 다루는 김의 분석 능력만큼은 부러워하며 탐내고 있었죠. 박은 자신이 숫자에 약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이번 프로젝트에 김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김은 박이 리드하는 팀에 스태핑이 됩니다.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으로 패스트 패션 업계의 리더로 떠오른 ‘회사 U’가 박과 김이 몸담고 있는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입니다. 컨설팅 회사의 프로페셔널 스탠더드에 따라 클라이언트 회사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할 수 없는 걸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U는 이미 십여 년 전에 중국/홍콩 시장에 진출했지만 그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던 차에, M&A를 통한 극적인 성장을 기대하며 ‘브랜드 G’를 타깃으로 지목해 박이 리드하는 팀에게 듀 딜리전스(due diligence:실사) 프로젝트를 맡긴 것입니다. 빠른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숨 가쁘게 돌아가던 4주간의 짧은 프로젝트가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라, 이제 곧 박은 U의 주요 경영진 앞에서 파이널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됩니다. U를 창립한 전설의 노 회장도 참석하는 만큼 아주 중요한 자리죠.
그런데 스마트한 박이 어떻게 된 걸까요? 프레젠테이션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쉴 새 없이 다리를 떨고, 손바닥에 고이는 땀을 계속 양복바지에 닦아내고 있으니. 소수가 모인 자리에선 온갖 감언이설을 술술 풀어내는 박이지만, 그런 박도 ‘무대공포증’ 같은 게 있나 봅니다. 팀원으로 있을 때야 큰 약점이 되지 않았겠지만, 이사로 승진한 마당에 프레젠테이션을 못한다면 큰 문제가 되겠죠? 우황청심환까지 먹은 박은 자기 위장이 요동치며 내는 꾸르륵 소리가 경영진의 귀에 들리는 것 같아 한층 더 안절부절못합니다.
‘아, 바보 같이… 이러다간 내가 긴장하고 있는 걸 다 들켜 버릴 거야. 회장은 왜 웃고 있는 거지? 뭔가 쓰고 있는 저 상무는 또 뭐야?’
박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식은땀이 셔츠를 적십니다. 박은 경영진이 떨고 있는 자기를 보고 웃음을 참고 있다고 확신하자 불안이 고조에 이릅니다. 바보 같이 떨고 있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감정이 구멍들을 통해 바깥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박은, 그게 투명성에 대한 환상이고 착각이란 걸 까맣게 모르고 있는 거죠.
결론을 발표하는 마지막 슬라이드로 넘긴 박. 저런, 안 그래도 숫자에 약한 박이 잔뜩 긴장한 탓에 타깃 회사의 회사 가치를 평가한 재무자료를 발표하다, 0 두 개를 더 붙이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고 마는군요. 중국 인민폐와 홍콩 달러, 한국 원화가 뒤 섞인 자료 사이에서 실수한 박. 박 밑의 팀장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직접 숫자를 다뤘던 김만 얼굴이 하얘집니다. 말단 팀원인 김은 클라이언트 사의 노 회장까지 앉아 있는 엄숙한 자리에서 진행되는 프레젠테이션을 중단시키고 이사의 실수를 정정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저 혹시라도 클라이언트 회사 쪽에서 실수를 눈치채고 지적하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한 가운데 얼굴에서 핏기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을 뿐이죠.
아,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TO BE CONTINUED)
3화
https://brunch.co.kr/@yoonsohee0316/213
*글의 목적을 위해 전략 컨설팅의 프로젝트와 컨설턴트에 관한 이야기나 묘사가 과장되게 꾸며져 있습니다. 실제와는 전혀 다른 소설임을 기억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