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위의 여자> - 존 파울즈
프랑스 중위의 여자.
좀 더 정확한 뉘앙스를 표현하자면, 프랑스 중위와 놀아나다 버림받은 여자.
아니면 사라 자신의 표현대로, 프랑스 중위의 창녀, 사라.
소설가는 ‘이건 소설이니까’ 하며 선택의 기로에 선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 3가지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그러나 난 소설가가 소설 속에 예언한 대로, 당연히 마지막 장에 쓰인 결말을 진짜 결말로 인식한다.
실제 (삽입으로서의 성행위가) 있지도 않은 일로, 프랑스 중위의 창녀라고 손가락질받고 수치와 모욕의 대상이 되다가, 약혼자가 있는 찰스와의 단 하룻밤의 정사로 혼자 딸아이를 키우며 살아가야 하는 사라나
준남작의 작위도, 거부 상속녀와의 결혼도, 자신의 명예도 모두 잃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정처 없이 떠돌며 살아가게 된, 거기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이었던 사라도 얻지 못하고, 심지어 사라와의 사이에서 난 딸의 존재도 모르고 살아가게 된 찰스나
모두 불행한 선택을 한 걸까?
시간을 돌려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실제로 시간을 돌려 돌아간대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거라는 걸...
그 선택이 삶을 비극으로 몰아간대도, 수치나 모욕으로 몰아간대도,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앗아간대도
역시 그 선택이 가장 나 다운 선택일 테니까.
세상적으로는 많은 것을 잃은 듯, 비극의 주인공으로 보일지 모르나
가장 자기 다운 선택으로, 가장 자신 다운 삶을 얻은 게 아닐까 싶다.
다행히도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인생이란 결코 하나의 상징이 아니며, 수수께끼 놀이에서 한 번 틀렸다고 해서 끝장이 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은 하나의 얼굴로만 사는 것도 아니며. 주사위를 한 번 던져서 원하는 눈이 나오지 않았다 해도 체념할 필요는 없다"
는 것을 그는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어니스티나처럼 곱지는 않았다. 어느 시대, 어떤 취향을 기준으로 삼더라도 아름다운 얼굴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서는 슬픔이 숲속의 샘물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거기엔 어떤 꾸밈도, 위선도, 발작도, 가면도 없었다. 더욱이 광기라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기의 커다란 비극 가운데 하나는 시간 부족이다. … 마치 인류의 궁극적인 목적이 완전한 인간성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번갯불에 가까워지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그러나 찰스에게, 또한 시대, 사회적으로 그의 동료였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존재를 지배하는 시간의 박자는 분명 ‘아다지오’였다. 문제는 한정된 시간 속에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남아도는 여가의 드넓은 광장을 채우기 위해 일을 일부러 질질 끄는 것이었다.
그를 매혹하는 것은 사라 자신이 아니라 - 그에게는 약혼녀가 있는데, 어떻게 사라가 그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 어떤 감정, 그녀가 상징하는 어떤 가능성인 게 분명했다. 그녀는 그에게 그가 상실해 버린 것, 상실해 버릴지도 모르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에게 미래는 언제나 거대한 가능성 덩어리였다.
제가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수치심과,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는 자각이에요
가끔 저는 그들을 동정해요. 전 그들이 갖지 못하는 자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모욕이나 비난도 저를 자극할 수는 없어요. 그 경계를 넘어선 곳에 저 자신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전 아무것도 아니고, 이젠 더 이상 인간도 아니에요. 그저 프랑스 중위의 창녀일 뿐……
저는 늘 제가 고독을 혐오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고독을 너무나 쉽게 피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자 제가 고독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