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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18. 2020

이 길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나

증도 해송 숲길

섬에 들어와 가장 많이 한 일은 걷는 일이었다. 마을에 있는 찻길 한가운데를 마치 내 길인 양 걸었다. 지나는 차가 거의 없어 가능한 일이다. 고운 모래와 진흙의 보드라움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맨발로 바닷길을 걸었다. 해변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바닷길로 걸은 후 돌아올 때는 바닷가를 따라 쭉 이어져 있는 해송 숲길을 걸었다. 소나무 10만여 그루가 들어선 숲길은 살짝 드리워진 그늘과 숲으로 불어 드는 바닷바람이 있어 시원했다. 이곳이 슬로시티라서 일까. 평소보다 좀 더 느리게 걸었다. 실은 섬에 들어온 날부터 배앓이를 하고 있어 배를 움켜쥐고 걷느라 걸음은 느려지고 자주 쉬었다. 



여행이 길어지니 몸에 피로가 많이 쌓인 모양이다. 담양을 떠나 증도로 이동하기로 한 아침, 갑자기 어지럼증이 심하게 왔다. 가끔 어지러움을 느낄 때가 있었지만, 그날은 유독 심했다. 회전하는 놀이기구에서 방금 내린 것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데, 평소보다 그 속도가 몇 배는 빠르게 느껴졌다. 일어서려고 하면 중심을 잡는 게 힘들었고 몹시 휘청거렸다. 떠날 시간은 다가오고 갈 길은 멀고. 잠시 눈을 감고 쉬어보기로 했으나, 빙빙 도는 느낌은 눈을 감아도 이어졌다. 


여행 떠나 처음으로 엄마 생각이 났다. 어지럼증은 몸이 약한 엄마가 자주 호소하는 증상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자주 아파서 누워 있었는데, 그게 참 싫었다. 엄마가 아닌 도우미 아주머니가 싸주는 차가운 도시락이 싫었고, 방과 후 엄마 앞에서 재잘재잘 하루 일을 얘기하고 싶을 때 입 다물고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싫었다. 암이나 심장병 같은 생사를 다투는 중병도 아니면서 늘 아프다고 하는 엄마가 꾀병을 부리는 거라며 심통을 부리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엄마의 아픈 자리를 따라 밟는다. 허리가 아파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고, 발톱이 살로 파고들어 피가 나고, 무릎에서는 뚝뚝 소리가 나며, 세상이 제멋대로 빙빙 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지럼증 선배에게 한 수 배우겠다는 듯이 이것저것 물었으나, 그저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도 부리지 않던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는지도.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느껴져도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실제로 넘어지지는 않는다는 엄마의 말에 용기가 났다.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전날 비가 쏟아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늘이 맑았다. 막상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고 햇빛을 받으니 실내에서만큼 세상이 빙글빙글 돌지는 않았다. 


담양 숙소를 떠나는 날 아침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하정우 <걷는 사람, 하정우> 중


언제부턴가 막막함을 느낄 때마다 걸었다. 걷는 일로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겠지만, 실컷 걷고 나면 문제가 달라 보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만큼 피곤하고 우울해도,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걸을 수 있게 된다.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이 오히려 가장 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인지 모른다. 


담양에서 광주로 나가는 좌석버스 (좌) /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내린 지도 터미널 (우) - 여기서 차로 30분쯤 들어가면 증도


빙빙 도는 길 위에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뿐인데, 몇 시간쯤 지나니 어느새 섬에 도착해 있었다. 영원히 돌 것 같던 세상도 잠잠해졌다. 아무리 목적지를 정한다 해도 실제 길 끝에 뭐가 있을지는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 끝을 알 수 없음에도 미지의 길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과정이 삶일 것이다.  


무거워진 다리와 화끈거리는 발바닥으로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해가 질 때까지 걸었다. 해가 질 무렵 부글거리던 속이 많이 편안해졌다. 


우전 해변을 걷다 보면 고운 모래와 진흙을 고루 밟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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