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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24. 2020

슬픈 맛으로 기억되는 우럭탕

취향의 존중

압해도에서 점심을 먹고 목포로 가는 차 안에서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방금 겪은 일에 대한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안군에 있는 몇 개 섬들을 돌아보는데 계획보다 시간이 더 걸렸고, 목포에서 먹기로 했던 점심을 압해도를 떠나기 전에 먹었다. 때를 넘겨 몹시 허기져 있었기에 우럭탕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뿐이었다. 


한참을 달려 ‘맛의 도시 목포’라는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알았다. 압해도에서 먹은 우럭탕은 슬픔 그 자체였다는 걸. 청양고추조차 넣지 못한 허연 우럭 지리는 비렸고, 마지막에 넣은 칼국수가 탕 속에 풀어지자 맛뿐 아니라 냄새마저 슬퍼졌다. 신안 섬들의 아름다음에 취해 좋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려던 참이었기에 더 슬펐는지 모른다.  


역시 취향은 적당히 섞는 걸로 타협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과 함께 여름마다 한 달씩 여행을 다닌 지 7년째. 그동안 동행을 하면서도 각자의 취향을 타협하지 않고 잘 다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취향 사이에 차이가 적어 긴장이 별로 없었다. 바닷가를 유유히 걷다 카페를 발견하고 크림 티를 주문한다. 모두 홍차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저 각자의 잔에 홍차를 따르고 누군가는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고, 누구는 설탕만, 다른 누구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시면, 함께 각자 취향껏 티타임을 누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공간에서 각자 먹고 싶고,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가능해 타협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음악 취향은 우리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해결하기도 했다. 각자 좋아하는 음악을 같은 수로 선택해 모은 후 차례가 고루 돌아가도록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 헤비메탈이나 하드록, 얼터너티브, 아트록에, 재즈, 가벼운 팝이나 발라드, 트롯,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음악들까지 다양한 음악이 섞여 있는 플레이리스트를 함께 듣다 보면 생각보다 재미있다. 누가 고른 곡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채게 되고, 음악을 들으면서 그 음악을 고른 사람에게 조금 더 다가가게 되면서. 


이렇게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며 아이들과 멋진 동행이 되어 왔는데, 일곱 번째 여행을 한국 국내에서 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타국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자라온 아이들과 달리 내게는 고국의 맛에 대한 추억과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매운맛에 대한. 


해남의 한 기사식당_갈치조림 백반


갈치조림이 나오는 백반집에 가고 싶지만, 한 아이가 매운 걸 못 먹는다. 심지어 후추 한 알 정도만 들어가도 알아채고 먹지 못한다. 신안의 섬들을 돌아보고 목포를 가기로 한 날도 그랬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 목포에서 먹기로 한 낙지를 압해도에서 그냥 먹기로 했다. 낙지 거리를 찾아 낙지 전문 식당에 들어갔지만, 바로 그날까지 금어기라 낙지 요리는 시킬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가능한 메뉴는 우럭탕과 회덮밥 두 가지뿐. 고심 끝에 우럭탕을 매운탕이 아닌 지리로 끓여달라고 주문하면서, 심지어 청양고추도 빼 달라고 했다. 우럭탕을 각자 취향껏 먹을 수 있도록 1인분씩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압해도 낙지전문 식당에서 먹은 우럭탕 (지리) _7/22까지 낙지 금어기라고 함


서로 조금씩 양보해 타협을 한 선택은 결국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차라리 매운탕을 시키고 아이는 밑반찬에 밥을 먹으라고 할 걸. 그 편이 아이들도 나도 행복했을 텐데. 괜히 매운 걸 못 먹는다고 아이를 타박하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 


로버트 그린은 <권력의 법칙>에서 절대 피해야 할 것으로 외모와 취향에 대한 농담을 꼽았다. 취향이 자존심의 가장 민감한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존엄을 인정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존중해야 하는 것이 바로 취향이라는 말이다. 부르디외는 “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이다.”라고 했다. 취향은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될 수 있는 모든 것의 기준이자,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셜미디어의 비중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요즘, 개인의 독특한 취향이 지식이나 재산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슬픈 우럭탕 덕분이랄까. 더 이상 적당히 섞는 걸 타협이라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행은 오늘도 계속된다. 


완도에서 아이들에게 회를 넉넉히 시켜주고 매운탕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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