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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11. 2020

슬로시티, 몹시 느렸지만 그렇기에 따스했던

창평 삼지내 마을

담양 창평면 삼지내 마을에 가기 위해 아침 9시 반쯤 숙소를 나섰다. 차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두 시간 반이 걸려 겨우 도착했다. 9킬로미터의 그 길을 걸어갔다 해도 그보다는 적게 걸렸을지 모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슬로시티(Slowcity)’ 중 하나인 그곳에 가는 길은 그야말로 ‘슬로’ 그 자체였다. 


303 번 버스라 해도 어디 서는지는 그때그때 다르니 앞에 붙여 놓는 표지를 잘 확인하고 물어야 한다


두 시간 반 중 두 시간은 버스를 찾고 기다리는 데 보낸 시간이다. 지도 앱의 정보는 정확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물을 때마다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같은 번호를 달고 있는 버스라 해도 실제 서는 정거장은 그때그때 달랐기에, 버스를 탈 때마다 물어야 했다. 배차 간격도 길어 버스를 놓치면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내릴 곳을 두 정거장쯤 남겨 놓고 같은 번호의 다른 버스로 갈아타기도 했다. ‘느림’에 익숙지 않은 나는 그 모든 시스템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렵게 삼지내 마을에 도착하니 그곳은 ‘슬로시티’라기보다는 이미 ‘멈추어 버린’ 마을 같았다. 블로그나 여행 책자에 열린다고 적혀 있던 장터는커녕 한과나 쌀엿 같은 그곳 전통 먹을거리를 파는 달팽이 가게도 열지 않았다. 문을 닫은 지 오래된 건지 가게는 폐가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대표적인 고택들은 모두 자물쇠를 걸어 잠가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한과나 쌀엿 만들기 체험이나 떡메치기 체험 등은 기대도 할 수 없었다.   


창평 삼지내 마을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낮은 돌담길을 따라 작고 조용한 마을을 아주 천천히. 마을 가운데 덩그마니 앉아 있는 달팽이가 쓸쓸해 보인다. ‘느림의 삶’을 상징하는 슬로시티의 로고, 달팽이가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골목을 돌다 보니 문을 연 한옥 카페가 보였다.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는데, 그곳은 여전히 손님을 맞고 있었다. 팥빙수와 레모네이드를 시켜 더위를 시키며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함께 나온 한과를 입에 넣으며 문득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왜 슬로시티인 삼지내 마을이 망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관광객이 줄고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이 ‘슬로시티’로서의 실패인가? 


창평 삼지내 마을 내 카페 '갑을원'


그러고 보니 찾아오는 관광객 숫자와 관계없이 삼지내 마을은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잘 보호하고 있었다. 차량 통행이 적어 많이 걸어야 하는 곳이고, 주민들은 전통 음식과 문화를 잘 보존하며 그곳에서 느리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 슬로시티가 갖춰야 할 조건들을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는 ‘느림’이 없어, ‘느림’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마을을 걸어 나오면서 보니 풍광이 조금 달라 보였다. 방문객들을 위해 열어 놓은 대문 사이로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정원을 볼 때, 정원 한편에 널어놓은 빨래들이 함께 보였다. 그리고 그 대문 사이로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밖을 나서는 할아버지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느림'은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제 속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창평 삼지내 마을


돌아오는 길, 역시나 담양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제시간에 오지 않았고, 한참 기다린 후 도착한 버스는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했다. 한 시간쯤 더 기다려야 오는 버스도 담양으로 가는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길을 건넜다. 일부러 반대 방향으로 가는 광주행 버스를 타기 위해. 삼지내 마을로 가는 버스 안에서 기사 님이 자세히 일러준 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담양행 버스가 오지 않으면 반대로 광주로 가서 담양 가는 버스를 찾아 타라고. 광주행 버스는 25분에 한 대는 오니까. 여러 가지 상황을 들어 자세히 설명해 준 기사님 덕분에 돌아올 때는 반 시간을 단축해 두 시간 만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슬로시티를 다녀오는 길 위에서 나는 ‘느림’의 맛을 조금 보았다. 잠시의 기다림도 없이 차로 도어 투 도어 이동하던 빠른 삶에서 벗어나, 길을 묻고 더듬어 가는 ‘느림의 삶’을 아주 조금 체험했다. 길 위에서 많은 사람에게 물었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나서며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그 답들은 똑 떨어지는 정답은 아니었지만 모두 따스한 온기가 담긴 답이었고, 여정을 줄여주지는 않았지만 그 여정을 따스한 추억으로 만들어 주었다. 몹시 느렸지만 그렇기에 따스했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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