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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Nov 12. 2020

걸어라! 위치를 바꾸면 역사도 바뀐다

도심에서의 산책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뒤, 가장 먼저 내 귓가를 맴돈 소리는 "걸어라!”였다. 당시에는 걷는다는 생각 만으로도 두렵고 떨렸다. 천성적으로 몸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데다 방향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길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막막했기에. 


더위를 핑계 대며 밖으로 나가는 대신 트레드밀 위를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창 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의 한 부분이 그림의 화폭처럼 정지해 있다. 설사 길을 잃고 싶다 해도 잃을 수 없는 곳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제자리걸음만 한다. 고작 다리를 튼튼히 하려고 걷기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람쥐 쳇바퀴에서 내려와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높은 빌딩들이 무서운 기세로 나를 내려다본다. 그 앞을 개미보다 작은 존재로 꾸물꾸물 지나간다. 화려한 상점의 쇼윈도들은 내게 지갑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이다. 빌딩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정신없이 지나치는 차들. 내가 걷고 있는 이곳은 도시 한복판. 맑은 공기와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숲이나 모든 걸 품어줄 넓은 바닷가가 아니다. 잠시 정신이 아뜩하다. 길을 잃기 위해, 나를 잃기 위해 걷기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나는 어디에 있는가?
 

과거의 시간을 차곡차곡 밟아 현재에 이르렀고, 지금 이 순간도 멈추지 못하고 일정한 속도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시간 속에 갇힌 나는 단 한 발자국도 한 방향으로 뚫린 시간의 통로를 넘어갈 수 없다. 과거의 선택들이 차곡차곡 쌓인 현재라는 감옥에 갇혀 꼼짝달싹 할 수 없다. 


하지만 공간은 다르다. 마음만 먹으면 두 다리로 굳건히 서 있을 위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공간은 넓고 가능성은 무한하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8차선 도로 앞, 찻길을 내려다보는 육교 위, 돌아설 수 없는 일방통행로, 막다른 골목 끝,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다. 나를 위축시키려 무섭게 내려다보는 고층 빌딩도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 결국 내 발 밑에 밟히게 된다. 


누군가 과거를 들먹이며 내 삶에 제 멋대로 이름 붙이려 할 때, 나는 걸을 수 있다. 위치를 바꾸면 역사도 바뀐다. 걷는 동안은 갇힌 자가 아니다. 삶의 위치를 바꿀 수 있고, 삶의 범위를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다. 비록 시간이 나를 가두려 할 지라도 지금 위치에 나를 고정시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한. 


힘차게 걷고 돌아오자 오래간만에 단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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