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팡(红坊:Red town)
지하인간
-장정일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우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레드 타운, 홍팡(红坊)에 들어서자마자 머리를 스친 단어는 ‘거칠다’였다.
한자를 아티스틱하게 변형시킨 붉은 로고가 입구를 알리고, 그 안에 다양한 갤러리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손으로 더듬어 본다면 결이 곱지 않고 험할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 그 벽돌들의 붉은색이 이곳 이름을 자연스럽게 ‘홍팡’이라 부르게 했을 것이다. 이곳은 본래 삭막한 철강공장 터였다. 널찍한 철강공장 터를 아티스트들의 작업장으로 내어 주면서 갤러리들이 생기고, 각종 예술 관련 업체들과 디자인 소품, 가구 업체들도 따라 들어왔다. 거칠기만 하던 삶의 터전이 예술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뉴욕의 미트패킹 디스트릭트(Meatpacking District)가 떠올랐다. 미국 뉴욕 웨스트 빌리지의 한편 크리스토퍼 스트리트에서 14번가까지, 본래 도살장과 축산 가공 공장이 모여있던 지역을 재개발해 맨해튼의 패션 중심지로 주목받고 있는 곳. 거리마다 트렌디한 레스토랑과 디자이너 숍, 편집매장, 부티크 호텔, 인기 클럽들이 성업 중인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와 비교하자면, 홍팡이 보여준 변신은 여전히 ‘거칠고 투박한’ 삶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순박하고 순진한' 변신이 아닐까.
상하이에는 이렇게 거친 삶의 터전을 재단장한 예술지구가 여럿 있는데, 그중 홍팡에는 주로 조소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와 작업실들이 들어섰다. 홍팡에 들어가자마자 넓은 잔디밭에 마치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듯한 거대한 크기의 조소 작품 여럿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하얀 트렁크 하나만 달랑 입은 채 축 늘어진 배를 그대로 드러내고 뒷짐을 지고 있는 아저씨가 보통 사람 두 배의 크기로 서 있다. 사람 키보다 더 큰 사람의 머리통이, ‘머리’란 말보다는 ‘대갈통’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모습으로 떡하니 잔디밭 위에 놓여 있다. 실물 크기의 달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기계 부품으로 조립된 듯한 소도 보인다. 색색의 스타킹을 신은 늘씬한 다리들이 몸통 없이 죽 늘어서 있다. 형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추상적인 조소 작품들도 눈에 띈다. 누군가는 의도를 가지고 전체적인 설계와 배치를 했을 테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난 ‘거칠게’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작품들을 그 모습 그대로 투박하게 만났다.
조소 작품은 그림과 달리 덩어리가 있고, 만질 수 있도록 실재한다. 그림이 시각에만 충실하다면, 조소는 시각뿐 아니라 질감을 실제 느낄 수 있는 ‘촉각’도 만족시키는 예술이다. 하지만 보통 조소 작품 전시회에 가면, '절대로 만질 수 없다'라고 못을 박아 놓는다. ‘만지지 마시오’란 팻말을 볼 때마다, 난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린다. 만지지 못하게 할 거면 그림을 그리지 왜 조소 작품을 만들었냐고. 하지만 홍팡에선 달랐다. 신생 예술 지구답게, 아직 다듬어지지 않고 덜 세련된 젊은 작가들답게, 거칠고 조야한 대신 금기나 예의 등을 따지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다. 슬쩍 작품 하나하나를 더듬어 그 실재를 손끝으로 감각할 때, 무섭게 나타나 제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거칠고 험한 나무의 결을 만져보고, 철의 차가움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때로는 뾰족한 돌의 표면을 눈을 감고 느껴 보았다. 그저 눈으로 바라볼 땐 그저 그랬던 작품들이 손끝을 통해 감각될 때, 작품 하나하나의 인상이 몹시 강렬했고 개성이 짙었다. 더듬어 보지 않았다면 끝내 깨닫지 못했을 아름다움을 감각한 것이다. 짧은 시간에 훨씬 많은 정보를 주는 건 분명 시각이겠지만, 적지만 중요한 정보를 가장 강렬한 방법으로 전달하는 건 분명 촉각일 것이다. 손끝으로 눈으로 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본 셈이다. 오직 젊음과 신선함으로 ‘대충대충 함부로’하는 듯 거칠게 작업하는 젊은 작가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나 역시 '거칠고 투박하게', 그렇게 작품 하나하나를 감각하며 만났다.
사실 홍팡을 찾은 것은 거친 삶의 파도에 휩쓸려다니다 잠시 숨어 쉴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나만의 '비밀 외출'을 감행한 것이었다. 홍팡에서 '거친' 작품들을 '거칠게' 만날 때, 오히려 그 어떤 때보다도 내 마음은 보드랍게 어루만져지고 잠잠하게 위로를 받았다. 거친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피어난 ‘예술’을 감각하면서 ‘위로’를 받은 것이다.
갤러리에 전시된 조소 작품들과 젊은 아티스트들이 실제 작업하는 작업실까지 슬쩍 들여다 보고는 카페에 들어와 따끈한 커피를 시켜 놓고 창밖을 감상했다. 지금 이 시각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낯선 곳에, 잠시 틈 사이에 숨어 있다는 생각에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레는 기분이 싫지 않아 커피를 조금씩 홀짝거리며 아껴 마셨고, 창밖으로 보이는 작품들과 그 작품들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때였다.
“이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내 이름을 듣자, 깜짝 놀라 커피잔을 놓칠 뻔했다. 성큼성큼 걸어와 말을 쏟아내는 뿔테 안경을 낀 이 남자가 누구더라? 안부 인사를 어정쩡하게 주고받는데,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남편과 의대 동기생으로 친한 친구였던 그는 몇 년 전 개업을 하기 위해 빚을 내면서 남편에게 보증을 서줄 것을 부탁했고, 남편은 흔쾌히 보증을 서주었다. 그리고 뻔하고 흔한 스토리가 남편에게도 결국 일어났다. 빚을 제때 갚지 못한 친구는 사라져 버리고, 남편에게 그 빚이 고스란히 넘어온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도 ‘미안하다’ 거나 ‘고맙다’ 거나 하는 말 한마디 없이,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사라졌던 그가 지금 상하이에, 그것도 내가 남몰래 숨어 있던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내 이름을 부른 것이다.
서먹서먹하고 어정쩡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그는 계속 나와 남편이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어왔다. 잘 지낸다고 건성으로 대답하는데, 그가 갑자기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분명 그는 ‘미안해야’ 할 사람이지만 지금 여기는 그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야 할 시간과 공간이 아니다. 그리고 그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야 할 사람도 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져 묻기는커녕 난 어정쩡하게 ‘괜찮다’고 말해 버렸다. 대충대충 함부로, 그렇게 거칠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건성으로 거칠게 ‘괜찮다’고 용서를 해버리고. 사과와 용서가 말도 안 되는 시간과 장소에서, 이렇게 대충대충 함부로 이뤄져도 되는 걸까? 이렇게 쉽게 ‘괜찮다’는 말을 흘려버리고, 그는 용서받았다고 믿고 편안해져도 되는 걸까?
하지만 홍팡은 그런 장소였다. 전시된 작품에 손을 대고 더듬어도, 작품들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마구 찍어대도, 아무도 엄하게 금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대충대충 던진 ‘미안하다'에도 ‘괜찮다’고 말해줘야 할 것 같은 그런 곳. 그는 아주 적절한 장소를 골라 잘도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남편과 내가 중국에 갔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의료 사고로 병원 문을 닫고 빚도 갚을 수 없던 그는 더 이상 진료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에서 성형수술을 위해 한국으로 가는 환자이자 관광객들을 모아 병원과 연결해주는 중개인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조금은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는 듯했지만, 그는 곧 명함을 내밀며 주변에 아는 중국인들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뻔뻔스럽게 부탁을 하고는 카페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져 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제는 식어버린 커피 잔을 움켜쥔다. 문득 그 모든 것이 실재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꿈이나 환상은 아니었을까. 방금 만났던 사람도, 방금 일어났던 일도, 홍팡이라는 예술 공간에서 공연된 하나의 짧은 퍼포먼스가 아닐까.
철강공장이든 도살장이나 축산 가공 공장이든, 거친 삶의 현장에서 ‘예술’이 피어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술’이 ‘삶’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 ‘예술’이 ‘삶’을 껴안지 않고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닐 테니까. 올이 성기고 굵게 짜인 천의 표면처럼 거칠게 주고받은 사과와 용서도 분명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거친 단면 중 하나다. 홍팡이라는 예술의 공간에서 짧은 퍼포먼스처럼, 어정쩡하게 던져진 ‘괜찮아’ 한 마디에 그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위로를 받았다면, 그 거친 ‘괜찮아’ 한 마디가 그에게는 그의 영혼을 위로하는 ‘예술’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밀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남은 커피를 천천히 공들여 마시며 창밖을 바라본다. 잔디밭에 놓여 있는 ‘예술’들 사이로 ‘삶’들이 분주히 걸어 다닌다. ‘예술’과 ‘삶’이 거칠게 얽히고설키면서 또 하나의 거대한 ‘예술’을 이룬다. 그 위로 하늘이 투명하다.
<홍팡(红坊:Red town)>
상하이의 트렌디한 예술지구 중 하나. 삭막한 철강공장 터를 아티스트들의 작업장으로 내어 준 것. 주로 조소 작품들을 전시하는 갤러리와 작업실들이 있다. 갤러리와 작업실 외에도 각종 예술 관련 업체들, 디자인 소품과 가구 업체들도 많이 들어와 있다. 예쁜 소품을 판매하는 아트 숍, 디자인 서적을 주로 판매하는 서점이나 북 카페 등이 있어 쇼핑을 하거나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