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영화촬영소 (上海影视乐园)
한 잎의 女子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여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여기 손님이 왜 이렇게 없어요?"
"음식 맛이 형편없거든."
"……."
"당신과 조용한 곳에서 얘길 나누고 싶었어."
영화 <색, 계> '왕치아즈'와 '이'의 대사 중
까맣고 딱딱한 고깃 덩어리 몇 점 사이로 대만식 쇠고기면(牛肉面)의 국숫가락을 젓가락으로 휘휘 젓다, 마주 앉은 그의 얼굴을 슬쩍 건너다본다. 통조림 옥수수 알갱이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는 그의 파스타에 굳이 포크를 대 보지 않아도 맛이 짐작이 간다. 영화촬영소 안의 유일한 카페. 그와 단둘이 이렇게 고요히 마주할 수 있는 공간, 그걸로 족하다.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면
시간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가?
상하이 영화촬영소는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1930년대쯤의 상하이라면, 전선에 묶여 느릿하게 달리는 전차에 올라타며 슬쩍 그의 팔에 팔짱을 걸어도 괜찮지 않을까? 파리 몽마르트르의 물랭루주처럼 프렌치 캉캉을 선보이는 무희들의 격렬한 몸짓 앞에서 그대로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혀 그의 팔에 안겨 오래도록 키스를 나눠도 되지 않을까?
세계적인 항구도시이자 금융의 중심지며,
국제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애국지사와 퇴폐주의가 동거하는 도시,
세련된 국제 문화와 함께 아편과 매춘이 성행하는 도시,
세계전쟁의 와중에 생겨난 각양각색의 유량인들이 몰려들던 도시,
상하이.
3,40년대의 올드 상하이라면 그와 나 같은 경계에 선 기묘한 커플도 넓은 가슴으로 받아줄 것만 같다.
욕망과 경계
사랑하지만 서로를 지켜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서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경계선에 선 인물들.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다가 결국에는 사랑 앞에 무너져 버려 목숨마저 던져 버리는
경계를 무너뜨린 연인, 왕치아즈.
떠나보내고 남아서야 사랑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지 깨닫는
경계 앞에 무너진 연인, 이.
낡은 간판들이 걸려 있는 3,40년대의 상하이 거리를 걸으며, 영화 <색, 계>의 주인공들처럼 경계선에서 위태위태하게 걷고 있는 그와 나를 본다. 그의 손이 곁에 서서 걷고 있는 내 손에 닿을 듯 말 듯 안타까이 스치는가 싶게 지나가더니 아스라이 멀어진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그의 곁에 바짝 붙어 걷는다. 내 오른손 손가락을 하나하나 벌려 그의 왼손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다. 그의 손을 꼭 붙든다. 다리로 휘감은 몸의 빗장을 풀지 않는 포옹처럼. 깜짝 놀란 듯 그가 얼굴을 돌려 내 눈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애국이라는 말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있다고…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런 두려움이 없어서 좋아."
영화 <색, 계> '이'의 대사 중)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왼손에 힘을 주며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들 사이로 더 깊이 파고든다.
"날 안을 때마다 그는 마치 뱀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어요. 내 심장까지… 난 노예처럼 그를 받아들이고 충실히 내 역할을 다해 그의 마음을 얻어내죠. 그는 매번 내가 피를 흘리고 고통의 비명을 질러야 만족해요. 그때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죠. 그는 내 반응이 가짜가 아니란 걸 알아요. 이러다… 이러다 사로잡히는 건 내가 되고 말 거예요. 점점 두려워져요. 마침내 그가 내 심장에 들어오는 순간 내내 구경만 하고 있던 당신들이 뛰어 들어와서 그의 머리를 쏴버릴까 봐!"
영화 <색, 계> '왕치아즈'의 대사 중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본다. 평일 오후 낡고 퇴색한 3,40년대 상하이 거리는 비교적 한산하다. 어딘가 기품 있고 매혹적인 올드 상하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튀는 웨딩촬영 커플 몇 쌍이 여기저기에 서서 어색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촌스럽다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행복의 지극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자만심 어린 젊은 신부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기가 죽는다. 상하이 거리 어디서나 들려오던 한국말 소리가 들리지 않자, 잠시 경계를 풀 듯 가벼운 한숨을 쉰다. 그러다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깜짝 놀란 듯 다시 한번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살핀다. 다시 경계를 바짝 조이고 팽팽한 긴장의 줄을 당긴다.
내 안 깊숙이 파고들어오는 그가 마침내 내 심장에 들어오는 순간,
어딘가에서 내내 구경만 하고 있던 그들이 뛰쳐나와 그의 머리를 쏴버릴까 봐.
다가올 때는 거부하고, 함께 있으면서도 그의 실재를 믿지 못하는 나. 이렇게 손가락들을 사이사이 엮어 그의 뜨거운 손의 열기와 쿵쾅 거리는 심장을 감각하고 있음에도 그의 출입을 느끼지 못하는 나. 팽팽한 긴장의 줄을 당겨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는 나.
나는 사랑이 싫어요! 사랑이 참 싫어!
이런 것도 사랑일까, 슬쩍 물어오는 그의 물음에 단번에 소리쳤던 나. 평생 사랑받는 일과 사랑을 주는 일 모두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던 왕치아즈와 닮았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서 두려움 없이 순수하게 욕망을 찾아 나아가던 그녀는 마침내 그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경계를 무너뜨리고 미련도 후회도 없이 사랑에 몸을 던지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던진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나와 닮지 않은 저 먼 곳으로 달아나 버렸다.
나는 여전히 욕망과 경계
그 아슬하고 아찔한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고 있다.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면
시간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가?
'3,40년대 상하이'를 잠시 머릿속에 떠올려 보다 '탁' 소리 나게 덮는다.
어린 시절 왕치아즈처럼 사랑을 받을 줄도 줄 줄도 모르는 나,
여전히 사랑을 믿지 않는 나는
시공을 수백, 수천만 초월하여 낯선 곳에 데려다 놓아도
여전히 아슬하고 아찔한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바람을 맞으며 흔들린 채 서 있을 테니.
상하이 영화촬영소(上海影视乐园)
중국 영화 수십 편과 중국 드라마 수백 편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1930년대 Old Shanghai의 모습 그대로의 난징루, 쓰쿠먼 골목 등을 재연해 놓았다. 전차를 타고 내부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상하이 영화제작사의 영화 의상과 촬영지, 유명 연예인의 밀랍상 등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