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훔치니 운명마저...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환자분 성함 하고, 주민번호, 그리고 전화번호 여기 적어주세요.”
옅은 핑크색의 원피스 형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가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 진료기록부와 볼펜을 내밀었다. 소매 끝에 하얀색 테두리가 둘러진 것 말고는 다시 봐도 핑크색이다. 의사와 간호사는 흰색 가운을 입는 게 아니었나? 20년 인생 내내 병원에 처음 와 본 사람처럼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흰색이 순수와 정직을 상징한다면, 오늘만은 간호사의 가운이 흰색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참혹한 사건에서 불안, 분노, 절망, 공포 등 모든 감정의 실마리를 떠올리게 하는 색채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없는 ‘흰색’만 남겠지. 20년 인생 중 - 뭐 몇 달이 부족하긴 하지만 - 맞닥뜨린 최악의 순간에 무심하고 냉소적인 흰색을 본다면 두려움이 더해 하얗게 핏기가 가셔 버릴지도 모른다.
“환자분! 여기 인적 사항 기록하시라고요!”
빠져나갔던 의식이 그제야 돌아왔다. 진료기록부와 볼펜을 든 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던 모양이다. 간호사를 흘긋 바라보자 간호사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잠시 다른 차트들을 정리하며 나를 곁눈질해 본다.
‘이름. 그래, 내 이름이 뭐지?’
잠시 뒤를 돌아 A를 바라보았다. 나를 향해 잠시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움츠러든 어깨와 파래진 입술을 감출 수는 없었다. A가 가진 옷 중에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옷을 골라 입었을 게 뻔한데도 오늘따라 더 작고 어려 보인다. 이름, 내 이름이라…….
정현정.
나이를 여섯 살쯤 올려 주민번호를 제멋대로 적고, 전화번호도 뒤의 네 자리를 아무렇게나 적어 간호사에게 넘겨주었다.
“아보션(abortion) 환자예요.”
모든 것이 순식간에 끝났다. 눈을 떴을 때 여러 명이 누워 있는 병실에 누운 채 링거를 맞고 있었고, 곁에는 A가 안절부절못하고 앉아 있었다. 이렇게 간단한 걸 지난 한 달간 속을 태웠다고 생각하니 입에서 욕지기가 났다. 계단에서 일부러 굴러 떨어지려고 넘어져도 봤고, 어두침침하고 이상한 향냄새가 나는 곳에서 배 위에 침을 맞기도 했고, 검증되지 않은 약을 먹고 이틀 동안 배를 잡고 때굴때굴 구르기도 했다. 따가운 눈총을 뒤통수로 느끼며 병원을 나왔다. 아직 가을이 오지도 않았는데 뼛속까지 시리다. 몸조리를 잘해야 한다는 A의 말에 따라 삼계탕을 시켜 꾸역꾸역 뜨거운 국물을 밀어 넣었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며칠 무단결석을 한 뒤, 학교로 나갔다. 공대생인 A를 따라 공대 식당에 들어가 식판을 받아 들고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순간 움찔하며 들고 있던 식판을 떨어뜨릴 뻔했다.
정현정이다.
토목공학과 1학년 정현정. 단정한 단발머리에 청바지를 즐겨 입는, 수수한 학생. 뽀얀 피부에 눈이 좀 크다는 것 말고는 눈에 띌 게 없는 평범한 외모다. 만약 인문대나 음미대에 있었다면 이름 석자 알리지 못하고 묻혔을 법한 그런 외모. 인사 한 번 한 적 없고 말 한마디 나눠 본 적 없는, 한 마디로 모르는 사이다. A가 아니었다면 존재조차도 몰랐을…
"공대에서는 워낙 여자가 희귀하다 보니, 저런 애가 퀸카다.”
A가 지나가면서 흘린 말 때문에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인적사항을 적을 때, 하고많은 이름 중에 왜 ‘정현정’이란 이름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내가 아니기를 바랐을 뿐. 수술 후 A와의 관계는 금세 시들해졌다. 마치 A가 내 몸속의 무언가를 떼내어 뺏어버린 듯 A의 얼굴을 볼 때마다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후 B를 만났다. 친구 소개로 만나게 된 B는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길이었다. 유학을 마치자마자 번듯한 직장에 취직을 한 B는 여유로워 보였다.
“지금까지 연애 한 번도 안 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언제 마지막으로 헤어졌어요?”
두 번째 만남에서 술잔이 몇 잔 왔다 갔다 한 후 불콰해진 B에게 물었다.
“유학 가기 전에 대학 때 과후배를 잠깐 만났어요. 근데 미국 가서 떨어져 있으니 메일로 얘기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헤어지자 말자 말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멀어지던데……그러구보니 걔가 하나 씨랑 같은 학번이겠다.”
“과 후배면 경영학과?”
B의 옛 여자 친구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같은 대학에 나와 동갑이라니 자꾸만 궁금해졌다.
“아뇨. MBA를 하긴 했지만 학부는 토목공학과였어요. 졸업 후 건설회사 잠깐 다니다 좀 답답한 생각이 들어 MBA를 결심했죠.”
“토목공학과? 그럼 혹시 정현정?”
“어, 하나 씨가 그 녀석을 어떻게 알아요? 영문과면 인문댄데… 현정이가 그렇게 유명한가?”
“아, 아뇨. 아는 사이 아니에요. 공대에 친구가 있어서 그냥 소문 몇 개 들어서 이름을 아는 정도… 정현정이 XX학번 누구랑 사귄다더라, 알고 보니 양다리 걸친 정도가 아니라 문어발이더라, 뭐 그런 소문 있잖아요.”
“그래요?”
B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걸 느끼고 못을 박았다.
“뭐 공대에 여자가 귀해서 이런저런 소문도 많을 수 있지만, 유독 그런 소문이 많아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사실 며칠 전에 그 녀석이 한밤중에 전화해서는 만나자고 했었는데… 술에 좀 취한 것 같더라고요.”
B의 눈빛이 감상에 젖어 흔들리는 걸 본 순간 마음이 조급해졌다.
“사실… 동네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걸 봤어요, 정현정이라는 애. 순진하고 멋모르던 1학년 때라 그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잊히질 않네요."
반쯤 남은 술잔을 비우고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 버린 내 뒷모습을 보며 B는 허둥지둥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달려와 내 팔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며 B가 입을 열었다.
“하, 하나 씨, 왜 그래요?”
“죄송해요. 왜 하필 그 앤지… 조금 불쾌해서요.”
“하나 씨, 오해예요. 그 녀석이랑 사귀고 말고 한 것도 없어요. 그냥 선후배로…”
찬바람을 쌩 날리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사흘 동안 B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사흘째 저녁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못 이기는 척 만나 주었고, 3개월 뒤 나는 B의 팔짱을 끼고 예식장을 걸어 나왔다.
미안하다, 정현정. 너무 많은 걸 훔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