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같은 엄친아가 어떻게 내 바지를...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세상

by 윤소희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아버지의 중국 주재원 발령으로 소년의 가족은 베이징으로 이사했다. 중국에 가 본 적도 없던 소년이나 소년의 엄마는 아빠를 졸라 무조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동네에 가자고 했고, 소년의 가족은 왕징이라는 동네에서 한국 인이 가장 많이 산다는 아파트를 골라 이사를 했다.


이왕 4년 주재원으로 나와 있는 거, 학비 지원도 받으니 국제 학교에 보내자는 엄마의 강력한 주장으로 소년은 이사 온 이튿날 바로 국제학교로 등교를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이제 겨우 1학년을 마쳤을 뿐인데, 새로운 학교에서는 이미 2학년 첫 학기가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고 하자, 소년은 어리둥절했다.


영어도 중국어도 잘 못하는 소년은 본능적으로 한국어가 들리는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게 되었고, 같은 반에 3명이 한국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중 두 명은 단짝인지 하루 종일 붙어 다니고 쉬는 시간마다 축구를 하는데, 나머지 한 아이는 쉬는 시간에도 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다. 나머지 한 아이의 이름은 에릭. 소년은 등교 첫날부터 이상하게 에릭에게 마음이 갔다. 그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며 관찰한 결과, 에릭은 영어도 중국어도 모두 유창하게 하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어려운 문제를 내도 척척 풀 수 있을 만큼 우등생이다.


에릭 같은 '엄친아’와 친구가 되는 게 가능할까, 소년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에릭은 말이 거의 없는 편이었지만, 선생님이 소년에게 뭔가 질문을 할 때 소년이 못 알아듣고 있으면, 얼른 작은 소리로 통역을 해주며 소년을 배려했다. 그날그날의 과제를 받아 적을 때도, 에릭은 소년에게 살짝 통역해 소년이 과제를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다.


소년은 점점 얌전하고 친절한 에릭 옆에 하루 종일 붙어 있게 되었고, 에릭과 단짝이 되었다는 생각에 낯선 국제학교 생활에도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춘지에’라고 한국의 설 명절이 다가오자 학교가 들썩들썩 해졌다. 학부모들 앞에서 중국 전통 노래나 무용, 쿵후 등을 공연하고, 간식거리와 장난감 등을 파는 바자회도 열렸다. 치파오를 입은 아이들과 공연을 보거나 바자회 봉사를 도우러 온 아이들로 떠들썩했던 그날 역시 소년은 에릭 옆에 바짝 붙어 다녔다. 장난감 코너마다 흥분하며 뛰어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에릭은 무심한 눈길로 바자회 공간을 천천히 한 바퀴 돌더니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 멍하니 떠뜰석한 풍경을 바라보는 에릭 옆에 소년도 나란히 섰다. 마음속으로는 방금 지나가며 보았던 장난감들 중에 뭘 먼저 사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에릭의 도움 없이 혼자 가서 사는 일은 어려울 것 같아, 일단 머릿속으로 고민을 마무리하는 동안 에릭 옆에 서 있기로 했다.


그때였다. 소년은 갑자기 아랫도리가 썰렁해져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니 허리가 고무줄로 되어 있는 치파오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져 있는 게 아닌가. 속옷마저 엄마 말대로 고무줄 달린 트렁크를 입었더라면 어찌 될 뻔했던가. 그 짧은 순간에도 속옷이 딸려 내려가지 않은 것에 안도하던 소년은 얼른 추슬러 바지를 입지도 못하고 그냥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년의 갑작스러운 울음에 떠들썩하던 행사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년의 아랫도리에 쏠렸다. 그리고 일부 개구쟁이 사내아이들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에릭은 무연한 눈길로 행사장을 바라볼 뿐 그곳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고, 가까이 있던 선생님 한 분이 소년의 바지를 추켜올려주며 행사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에릭이… 소년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앞으로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어야 할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하나 씨가 훔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