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그녀 옆에는 약봉지들이 나뒹굴고

저혈당 쇼크

by 윤소희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어쩐 일인지 그 깍쟁이 기지배가 자기 집에 초대를 다 했다. 손주들 하는 그 파자마 파티 같이 자기 집에서 하룻밤 자면서 이야기도 나누잔다. 이혼한 뒤로 촌구석 작은 집으로 꼭꼭 숨어버린 게 누군데, 마치 우리가 상대 안 해줘서 못 놀기라도 한 듯 살짝 섭섭하다는 기운을 내비쳤다. 하마터면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올 뻔했지만, 내 교양을 생각해서 참았다.


명희도 초대했다고 하니, 오랜만에 여고 시절 3 총사로 돌아가 밤새 이야기꽃을 피워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도록 서둘러 집을 나오며, 얼마 전 설이라고 며느리가 보내 준 상주 곶감 몇 개를 쌌다. 그 기지배 무슨 음식을 준비했는지 몰라도, 곶감이라면 후식으로 먹어도 괜찮겠지? 뭐 이참에 며느리 자랑도 하면 너무 염장지르기인가?


뭐, 어때? 염장지르기로 따지면 그 지지배 따를 사람이 없었는데. 여고 시절, 삼총사라고 같이 다니긴 했지만, 그 지지배가 나를 뭐 친구로 제대로 대접한 적 있나? 남자 애가 갖다 줬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나한테 선심 쓰듯 던져 준 실반지는 내 굵은 손가락에 들어가지 않았다. 또 다른 애가 녹음해 준 음악 테이프가 지 스타일 아니라고 내게 던졌지만, 그 테이프에는 음악 뿐 아니라 그 남자애가 애절한 목소리로 녹음한 그 지지배 이름이 들어 있었지. 지가 공부 잘하고 얼굴 좀 반지르르하다고 늘 나를 춘향이 향단이 보듯 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옛날 생각하니 혈압이 오르네. 참, 야침에 약은 잘 챙겨 먹었나? 우리 나이에 매일 챙겨 먹어야 할 약들을 꼬박꼬박 잘 챙겨 먹지 않으면 큰 일 나지.


워, 워. 그 지지배 때문에 혈압 높일 일 뭐 있나? 이제 다 지나간 일인데. 남편이 꽤 규모가 큰 사업체 사장이라고 뻐기더니, 그 잘난 서방도 젊은 년한테 뿅 가서 바람나고, 돈 한 푼 못 받고 쫓겨난 거 보면 공부 잘한다고 머리 좋은 건 아닌 모양이지. 에휴,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야. 그동안 코빼기도 볼 수 없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래? 역시 시간이 약이라더니, 이제 마음이 좀 풀린 건가. 그래, 팔자 험한 년, 미워해서 뭐허고, 또 욕해서 뭐헐 건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친구끼리 의지하고 살어야지.


좌석 버스를 꽤 오래 타고 들어왔더니, 얼추 그 지지배 사는 동네 같다. 오래전에 다녀가곤 통 오질 않았더니,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 옳지, 이 농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바로 골목길로 올라가야지. 고 몇 년 새 더 늙었다고 오르막길이 힘드네. 목이 칼칼허니 숨이 답답한 게 요즘 중국 짱깨들이 보낸다는 미세먼지 때문인가? 이럴 땐 용각산을 먹어야 하는데, 에고, 급히 나오느라 안 챙겨 왔네. 약이 없으니 괜히 마음이 불안해지고 숨이 탁탁 막히네.


휴우. 다 왔다. 4층이었지? 뭐야? 엘리베이터가 없네. 또 올라가야 해? 망할 놈의 기지배. 이 촌구석에서 좀 나와 살라니까, 지가 귀농한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으이그. 못살아.


어라? 왜 현관문이 열려 있지? 이 지지배 요즘 정신줄 놓고 사나?

“희옥아, 희옥아! 나 왔어.”

현관문을 잘 닫고 현관에 신발을 벗고 안을 두리번거리며 지지배 이름을 부른다. 어째 답이 없다. 잠시 어디 나갔나? 비교적 깨끗이 정리된 거실 바닥에 웬 약봉지들이 나뒹군다.

“희옥아, 희옥이 없니?”

나는 걸음을 좀 더 내딛고 열려 있는 문들을 살핀다. 방에는 아무도 없다. 그 옆 화장실은?


“앗, 희옥아!”

희옥이가 화장실 세면대 옆에 쓰러져 있다. 쓰러진 희옥이 옆에도 여러 가지 약봉지들이 나뒹군다. 돌려 눕혀 놓으니 허연 얼굴을 하고 있는 희옥은 의식이 없다. 떨리는 손으로 119를 불렀다.


희옥은 저혈당 쇼크로 그렇게 저 세상으로 갔다. 망할 지지배. 그동안 코빼기도 안 비치다 죽는 모습 보여 줄라고 우리를 불렀나. 끝까지 내 속을 후벼 파는 나쁜 지지배. 온 집안을 나뒹구는 약봉지들 사이에 그 흔한 사탕이나 캐러멜 같은 건 왜 하나도 안 보이는 거야? 미련한 지지배. 이 많은 약 대신 사탕 하나만 있었어도 그렇게 가지는 않았을 텐데.


(입말의 맛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표준어가 아닌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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