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 에 걸린 줄리엣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안녕 하라,
엄마는 다 식은 주먹밥 한 조각을 아침이라고 밀어 넣어주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출근을 해 버렸지. 열네 살 넘치는 청춘, 어떻게 이 좁은 방에 하루 종일 갇혀 있을 수 있겠니? 오늘 아침엔 용기를 냈어. 엄마가 주먹밥을 밀어 넣어주려고 문을 빼꼼 열었을 때 있는 힘껏 걷어찼단다. 발랑 넘어진 엄마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걸 뒤로 하고, 미친 듯 뛰었지.
골목골목 좁은 길을 돌며 엄마가 찾을 수 없는 곳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어. 어느덧 작은 문이 내 앞을 딱 가로막는 거야. 허름해 보이는 작은 문은 조금 열려 있었어. 그 좁은 문틈으로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말이야. 마치 마법처럼 그 문을 열었단다.
아, 하라야…….
내 몸을 돌고 있는 피가 점점 뜨거워져. 오늘 아침의 용기가 내 속에서 나온 게 아니란 걸 이제야 알았단다. 바로 이곳이 날 애타게 부르고 있던 거야.
화려한 샹들리에와 황금빛 실크 벽지, 양초와 은촛대들, 유럽풍의 앤틱 가구들, 향기로운 꽃들이 풍성하게 꽂힌 크리스털 꽃병들. 은은한 클래식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방금 보그(Vogue)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 세련되었어.
클래식하면서도 은은하고 기품 있는 분위기에 조화되지 않는 게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준비되지 못하고 뛰쳐나온 내 몰골뿐. 얼굴까지 새빨개진 나는 얼른 돌아나가려고 뒤로 돌았어. 근데, 하라야, 이게 어쩐 일이지? 그 작은 문이 감쪽 같이 사라진 거야. 발을 동동 구르며 아무리 찾아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아, 저 남자.
계단 난간에 기대어 서 텅 빈 시선을 툭 떨어뜨린 채 홀로 고독히 서 있는 저 남자. 뼛속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품에 그 앞에 그대로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야. 아, 그가 날 발견하고 다가와. 허리 라인이 살짝 들어간 원버튼 보카시 롱 블레이저에 슬림한 스키니 바지, 앵클부츠를 신은 그의 늘씬한 걸음걸이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어. 이미 녹아내려 바닥에 흥건히 고인 내 심장을 밟을 수 있을 만큼 그가 가까워졌어. 가까이 서니 그의 키가 어찌나 큰 지 갑자기 내가 꼬마가 되어 버린 것 같아.
갑자기 그의 기다란 손가락들이 다가오는 거야. 그의 손이 내 오른손을 가볍게 쥐고 한참 왈츠가 진행되는 홀 가운데로 끌고 가는 구야. 난 초라한 몰골이 부끄러워 자꾸 뒷걸음질 치는데 그는 힘 있는 팔로, 하지만 부드럽게 나를 리드해 결국 난 왈츠에 몸을 맡겼어. 아, 그와의 관계가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고, 딱 이 왈츠의 속도로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왈츠의 스텝을 밟으며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내 영혼은 무서운 속도로 그에게 빠져들고 있어.
오, 하라야.
그날의 그 입맞춤.
그의 커다란 두 손이 내 뺨을 감싸고 그의 입술이 다가오던 순간부터, 아쉬운 듯 아쉬운 듯 포개진 입술을 떼는 순간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의 모든 감각이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나. 달큼한 그의 땀냄새, 촉촉하고 말캉한 혀의 감촉, 귓가를 간질이듯 스친 바람 소리,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신비한 풍경들… 평생을 그 기억 하나만 붙들고 살래도 살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강렬한 감각들.
하라야,
뭔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해. 설명하긴 어렵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육감 같은 거라고 할까? 아무튼 믿어줘, 하라야. 혹시 네 앞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더라도 그 모든 것이 사랑을 위해 꼴 치러야 할 대가였음을 기억해 주렴. 그리고 내 친구, 하라. 너만은 날 이해해 주길…
“사람의 몸에 이 독이 닿으면 의식은 멀쩡하지만 몸이 순간적으로 마비되지.”
골목을 헤매다 볼록한 물고기 사인을 보고 들어간 곳에, 오, 이 놀라운 주술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를 사랑하는 나의 간절한 염원이 그 주술사를 내게 끌어당긴 건지도 몰라. 하라야, 이건 운명이야. 겨우 방을 빠져나와 도망친 순간 주술사를 만나고 독을 손에 넣는다는 건.
하라야,
울고 있는 네 목소리가 들리는데… 눈이 떠지질 않아. 하라야, 울지 마. 지금은 울 때가 아니야. 얼른 달려 나가. 내가 부탁한 편지를 꼭 그의 손에 전해야 해. 어서!
***
쫓겨나듯 복집 문을 밀고 나오는데 눈물이 흘렀다. 리애를 마비시킨 것이 복어에 들어 있다는 테트로도톡신이 아니라 간절한 믿음과 바람이었다니...
눈물을 훔치며 골목길을 헤매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작고 허름한 문틈으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음악에 이끌려 안쪽으로 들어서사 바깥 세계와 사뭇 다른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식당처럼 테이블이 간간이 놓여 있는 널찍한 실내에는 삼삼오오 남녀가 모여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음악이 들려오는 홀 안쪽으로 들어서니 짝을 이뤄 빙글빙글 돌아가는 남녀 커플들의 스텝이 가볍고 부산하다.
내 눈이 어떻게 된 건가, 소매로 두 눈을 다시 한번 비벼본다.
숱이 듬성듬성 빠진 흰머리 할머니와 대머리 할아버지가, 허리가 구부정해 걸음이나 제대로 걸을까 싶은 커플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을 마주 잡고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아닌가. 뭔가에 홀린 듯 음악이 흘러나오는 홀 밖으로 나와 허름한 입구에 놓인 간판을 본다.
‘노인건강체조교실’
오, 리애, 내 사랑하는 친구.
치매 걸린 내 할머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