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그녀가 지방으로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이러다 헤어져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금요일 저녁, 문득 그녀가 그리워졌다. 아니 나무 수액처럼 싱싱하고 풋풋하던 그녀의 체취가, 마주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며 상사 욕을 할 때 씹던 마른오징어의 질감이 그리워졌다.
양쪽으로 철제 문이 좍 늘어선 길고 어두침침한 복도. 이미 밤 11시가 넘었다. 발꿈치를 살짝 들고 살금살금 걸었다. 복도의 제일 끝 왼쪽 문. 지갑 속에서 반짝하는 은색 열쇠를 꺼내 들었다. 필요 없다고 사양했음에도 그녀는 굳이 보조키 하나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어쩌면 이런 깜짝 선물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열쇠가 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순간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열쇠를 얼른 구멍에서 빼내고는 잠시 망설였다. 초인종을 눌러야 하는 게 아닐까. 열쇠를 줬다는 건 열 수 있는 권리를 준 게 아닌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왼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열쇠를 다시 구멍에 집어넣었다. 채칵. 채칵. 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간 열쇠가 어쩐 일인지 자꾸 뭔가에 걸렸다. 왼쪽인가 하고 왼쪽으로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결박당한 열쇠. 열쇠를 꽂아 놓은 채 문에 귀를 대고 안에서 무슨 기척이 없나 들어 보았다.
조용하다.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거라면 열쇠로 문이 당연히 열려야 한다. 꽂혀 있는 열쇠가 돌아가지 않는 건 안에서 잠금장치 옆에 있는 보조 락(lock)을 눌러 놓았기 때문이다. ‘서프라이즈!’하고 그녀 앞에 나타나려던 계획을 접고 그녀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안에서 희미하게 휴대폰 벨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뚝 끊겼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친절한 목소리만 흘러나온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분명 아까는 들리던 벨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져 통화 버튼을 쉴 새 없이 눌렀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한결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주먹으로 철제문을 탕탕 쳤다. 분명 그녀는 안에 있다.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세상 누구보다 굳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내 손가락에 전해지던 '채칵' 하는 감촉과 휴대폰 벨 소리를 들었던 내 귀를 더 믿는다. 철제문을 더 세게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문 열어!”
복도 반대 편 철제문 하나가 빼꼼 열렸다. 문틈으로 보이는 두 개의 눈동자가 쏘아대는 맹렬한 빛이 내 몸을 훑고 가자 순간 오금이 저렸다. 그녀의 이웃이라는 작자가 경찰에 신고라도 한다면? 두세 번 더 문을 내리쳤지만 아까보다 소리가 작아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 저편에 있을 안은 여전히 고요하다 못해 괴괴하다. 철제문은 단단하고 견고하게 잠겨 있고, 절대로 나를 그 안으로 들이지 않을 기세다. 오른손에 체중을 실어 철제문을 가격했다. 손가락과 손등에서 시작된 진동이 전신으로 퍼졌다. 얼얼한 통증이 밀려드는 몸으로 어두침침한 복도를 달렸다.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이용해 15층에서 1층까지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오피스텔 건물을 빠져나오자 휘황한 네온사인에 눈이 시리다. 자정이 다 된 시각,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술집으로 들어갔다. 소주 한 병을 시켜 병째 들이켰다. 술을 마시면서도 맞은편 오피스텔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자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죄다 죄지은 사람들 같다. 쫓아가서 멱살을 잡을까. 그러기엔 너무 많다.
소주를 두 병째 마시다 다시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자,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응? 나 집인데…….”
“나 집 앞이야.”
“정말? 근데 왜 안 들어오고…….”
단숨에 15층까지 올라갔다. 아까 그 철제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까 하다, 열쇠를 다시 꽂았다. 스르르 돌아가며 찰칵하고 열리는 문. 마치 오랜 저주의 마법이 풀린 듯, 너무도 쉽게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 신발도 벗지 않고 한눈에 들어오는 방 안을 이 잡듯이 훑어본다. 헐렁한 면티에 반바지를 입고 현관 앞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자다 일어났는지 헝클어져 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미리 연락도 없이…….”
“뭐하고 있었어?”
내 목소리가 싸늘해서인지 그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았다.
“응? 자고 있었는데…….”
그녀가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하품을 하는 모습이 조금 과장되게 보였다.
“근데 왜 열쇠가 안 열려?”
“엉? 방금 열쇠로 연 거 아니야?”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밖에 나가서 맥주라도 한 잔 할까?”
그녀가 묻는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신발을 거칠게 벗고 안으로 들어가 침대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녀의 조촐한 세간살이를 싣고 내려왔을 때, 내가 직접 골라줬던 더블 침대에는 하얀 침대 시트와 이불이 덮여 있다. 방 안에 다른 가구들은 거의 없어도 잠만큼은 고급 호텔처럼 하얗고 보송보송한 시트에서 자야겠다며, 세탁은 돈이 들더라도 세탁소에 맡기겠다고 그녀가 끝내 고집을 부려 고른 새하얀 시트와 이불. 방금까지 침대에 누워있다 기어 나온 듯 이불이 반쯤 젖혀져 있고 시트가 구겨져 있다. 침대에 걸터앉아 오른손으로 그녀의 베개를 어루만졌다. 가운데 눌려 있는 부위에 아직도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다. 베개를 베고 엎드려 누웠다. 보름달처럼 팽팽하고 싱그러운 그녀의 베개.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늘 풍겨오던 상큼한 샴푸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오른손을 베개 밑으로 집어넣어 본다. 베개에 엎드려 한 손을 베개 밑에 넣고 자는 건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다. 베개 밑에 손을 넣을 때 그 서늘한 감촉이 좋다고 했다. 몇 시간 밤 운전을 한 데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기운을 빼서 그런지 졸음이 몰려왔다.
눈을 번쩍 떴을 때는 이미 창문으로 밝은 햇살이 비어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내 옆에 나와 똑같은 포즈로 베개 밑에 손을 넣고 잠들어 있다. 엎드려 있던 몸을 살짝 일으켜 그녀 곁으로 다가가려는데, 하얀 베개 위에 놓여있는 무언가가 시선을 확 잡아챘다.
머리카락?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7센티 정도 될까 하는 짧은 털은 두껍고 몹시 검었으며 심하게 꼬불거렸다. 여전히 자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봤을 때 보다 머리카락이 더 자라 어깨 밑으로 20센티 정도는 내려와 있다.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는 구부러진 데 없이 반듯했으며 염색으로 옅은 갈색을 띠고 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음모는 짙은 밤색에 구불거리지 않는 직모에 가깝다. 짧고 지나치게 구불거리는 이 털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몹시 구불거려 혐오스러운 털을 그녀의 베개 위에 잠시 놔두고 담배를 천천히 태웠다. 그녀는 죽은 듯 미동도 없다. 담배 연기를 최대한 천천히 들이마셨다. 담배를 들고 있는 손이 몹시 떨린다.
어떻게 할까.
침대에서 일어나 여전히 누워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허연 허벅지가 탐스럽고 매끈하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어떤 빛이 그녀의 피부 위로 흐른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복숭아꽃 같다고 할까. 다 타들어간 담배를 눌러 끄고 다시 라이터를 켰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잠시 어루만졌다. 그녀의 베개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짧은 털을 들어 올렸다. 지지직 타들어가자 단백질을 태운 노린내만 오래도록 방안을 부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