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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Sep 11. 2021

휴, 하마터면 다른 누군가로 살 뻔했다

인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마터면 다른 누군가로 살 뻔했다. 


스물여섯,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때려치우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동기들처럼 여전히 KBS 아나운서로 지냈을 것이다. '현직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이 이점이 되어 책을 출간하는 일이 훨씬 수월할지 모른다. 여행은 지금보다 좀 덜했겠지만, 회사에서 대주는 해외 연수나 각종 해외 출장으로 대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먼저 떠난 동기를 만나면, “우리는 맨날 똑같아”라는 말을 반복했겠지. 


서른, 교회에 가보자는 선배 언니의 말을 거절했다면? 


신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도무지 어떤 신이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하며 무신론자 아닌 무신론자로 살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도 만나지 못했을 테고, 심지어 친정 부모와 동생들과도 여전히 인연을 끊고 고아처럼 지냈을지 모른다. 그저 나 한 사람 생존하는데 급급했을 것이고, 삶에 의미가 없어 술이나 담배 등에 의존하며 살았을 것이다.  


서른여덟, 새벽 세 시에 일어나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내 책이 출간되는 일은 없었을 테고, 여전히 ‘OO 엄마’라는 타이틀 안에 숨어 우울하게 지냈을 것이다. 밴드 공연을 한다거나 바이올린을 배우는 일도 없었을 테고, 인스타 라방은커녕 SNS에 접속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과 매년 한 달씩 여행을 떠난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글을 생산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삶이 있다는 걸 모른 채 살았을 것이다. 


하나, 소희(昭曦) 대신 사림(思林)이라는 이름을 붙였더라면? 


내 선택은 아니지만,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작은 그때였다. (지금은 남남이 되었지만 그때는 뜨겁게 사랑했을) 엄마, 아빠가 뱃속에 있는 내게 지어준 이름은 사림(思林)이었다. 윤사림. 생각하는 숲. 하지만 막상 내가 태어났을 때 최종 선택한 이름은 전혀 다른 이름이었다. 소희(昭曦), 밝은 햇빛. 만약 ‘사림’으로 살았더라면 조용하고 변화가 덜한 (그래서 고생은 좀 덜 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눈에도 덜 띄고. 하지만 이름이 바뀐 순간, 운명도 바뀌었다.  


여러 번의 기로에서 하마터면 다른 누군가로 살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 다행이다. 흠도 후회도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내 삶이 좋다. 내가 선택해 온 길이 마음에 든다. 얼마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남은 삶 역시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대신 ‘나’로 살아가고 싶다. 


(아침에 아이들이 자기 이름의 뜻에 대해 다시 물었다. 시아버지의 주장을 따랐다면 큰 아이가 지금 작은 아이의 이름으로 살 뻔했다. 각자 지금의 이름을 받은 데는 뜻이 있음을 믿는다. 두 아이 앞에 펼쳐질 각자의 삶의 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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