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거리가 공감보다 필요할 때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내 손으로 아이의 유치를 빼준 적이 없다. 다행이랄까. 아이들은 이가 흔들릴 때 단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한 아이당 유치 개수가 20개라고 하니 이미 수십 번이나 그랬던 것.) 자기 손으로 흔들리는 이를 빼고 '빠진 이’를 전리품처럼 들고 와 자랑을 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빠진 이를 보고 감탄하다 그 이를 보이지 않는 곳에 잘 처리하고, 아이가 잠들면 베개 밑에 동전을 놓아주는 것뿐이었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보면 내 이를 뽑아준 건 분명 엄마였는데,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던 걸까. 엄마가 흔들리는 이에 실을 동여매거나 그 실을 잡아당기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아이가 아직 느끼지도 않은 통증을 미리 느끼고 두려워하느라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 말 것을. 가까운 이의 고통에 감정 이입하느라 그에게 정말 필요한 일도 제때 해주지 못할 수 있다는 걸.
학부 때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임상이나 상담을 하려 했는데, 내담자의 감정에 과도하게 감정 이입하는 것이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을 받은 적 있다. 상대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자질이지만, 내가 아파하느라 제때 적절한 도움을 제공할 수 없다면 좋은 상담자가 될 수 없다. 상담자는 조금 차가워 보여도 언제나 적정한 거리를 두고 필요한 도움이나 조언을 건넬 수 있어야 한다. 빨리 낫게 하기 위해 때로 갓난아기의 무른 머리에 주삿바늘을 꽂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끼는 이들에게 쓴 약을 건네야 할 때, 늘 주저한다. 그리고 어쩌다 건네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순간 쓴 약을 삼켜야 하는 이들보다 더 쓴 고통을 맛본다. 때로는 그냥 말 한마디 건네고도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 다 쓴 배터리처럼 방전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엄마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 이를 뽑는 용기를 키운 것처럼, 때로는 내 눈물을 보는 것만으로 아끼는 이들이 스스로 일어서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대신해서 눈물 흘리기보다는,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을 제때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적정한 거리를 두되 늘 단단히 서 있어서 언제나 기대고 싶을 때 어깨를 내줄 수 있는 사람이. 내 뿌리가 약해 흔들리면 그 누구도 기대어오지 못할 테니까. 여전히 자주 아프고 늘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튼튼한 뿌리를 꿈꾸며 조심스레 땅을 디뎌 본다.
*우리나라에서 빠진 이를 까치가 물어 가라고 지붕에 던지는 것과 비슷한 서양 풍습. Tooth fairy가 이를 가져가고 동전이나 작은 선물을 놓고 간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