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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살아 있고

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일

by 윤소희

괜찮아, 살아 있고.*


한동안, 아니 오랫동안 괜찮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 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이라는 끈적끈적한 늪에 빠져버린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작은 루틴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 드럼을 배울 때 고무판을 두드리는 것과 비슷하다. 특히 별다른 리듬 없이 같은 속도로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가며 딱딱 딱딱 칠 때. 물론 소리를 고르게 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에까지 집중해서 연습할 수도 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두드릴 수도 있다. 몸을 잠시 그곳에 두고 마음이 멀리 떠나 있어도 괜찮다.

딱딱 딱딱 딱딱 딱딱...

멍 때리며 영혼은 잠시 죽음을 경험하는 그 순간에도, 내 몸은 계속 움직인다.


살아 있다.


같은 시각에 어김없이 일어난다. 할 일이 없든, 하고 싶지 않든, 그래도 일어난다. 새벽을 깨우는 이들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 '굿모닝' 세 글자를 올린다. 다른 인사를 곁들일 여유가 없으니, 매일 똑같이 딱 세 글자만. 벌써 긍정확언 문장을 올린 사람, 캄캄한 천변에서 만 보 걷기를 이미 마친 사람의 인증사진, 상큼 발랄한 인사말들이 잔뜩 올라오고 있다. 나처럼 무기력에 빠진 사람은 그저 활기찬 이들의 에너지를 잠시 받아들이면 된다. 밖에서 방전된 배터리를 급속 충전하듯이. 미지근한 물 한 잔을 천천히 마신다. To-do-list를 적는다. 아무리 천천히 적어도 3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할 일이 몇 가지 되지도 않고, 매일 거의 달라지지도 않으니까. 그럼에도 매일 다시 새롭게 적는다. 감사한 일을 최소한 세 가지 적는다. 감사할 일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지어낸다. 그리고 미리 감사한다고 적는다. 무기력하긴 하지만 아직 죽은 건 아니라서 이렇게 작은 일들은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일들을 모아 무한반복한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에너지가 차오른다.


어제는 누군가와의 약속 없이도 혼자 집 밖을 나갈 수 있었다. 이런 사소한 일이 깜짝 놀랄 만큼 기쁜 일이다. 등 떠밀려 억지로 한 게 아니라, 내 손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거니까. 딱 그만큼의 에너지가 충전되었다는 뜻이다. 아직 멀었지만, 실망할 일은 아니다. 머리카락을 열심히 비벼 거기서 나온 정전기로 충전을 하는 것처럼 느리고 또 느리겠지만, 괜찮다. 에너지 충전을 그리는 선 역시 직선은 아니니까. 바닥을 붙어 기어가는 듯 보였던 선이 어느 날 갑자기 수직 상승할 수도 있다. 그게 삶의 묘미이기도 하고.


괜찮다, 나는 살아 있고.

아주 작은 일이지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 임진아 <읽는 생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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