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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Feb 06. 2023

식물들에게 라디오를 들려주지 못하는 이유 두 가지

라디오 조립과 프로그램 디제잉

시인은 키우는 식물들과 함께 라디오를 듣는다고 했다.* 라디오를 듣는 밤이면 식물들도 라디오 쪽으로 귀를 늘인다. 라디오 소리가 식물 사이사이로 막 뛰어다니면 식물들이 그걸 좋아하며 잎을 팔랑거린다. 내가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하는 건 라디오를 들려주지 않아서일까. 


나는 식물들에게만 라디오를 들려주지 않는 게 아니라 혼자서도 듣지 않는다. 귀가 예민한 건지 소리가 들리면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해진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작정하고 라디오만 듣겠다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내 손으로 라디오를 틀 일은 거의 없었다. 라디오는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탈 때 들은 게 전부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라디오를 들은 시간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 시간보다 적을지 모른다. 


라디오를 듣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건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말을 적게 하고 긴 음악을 틀 수 있는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이 단연 최고다. 다른 프로그램처럼 정신없이 진행되는 게 아니라, 오디오 기술자의 도움 없이 진행자가 직접 음악을 틀고 조절할 수 있다. 고요한 스튜디오 안에서 그야말로 완벽한 혼자가 되는 시간. 멘트도 방송작가의 도움 없이 직접 써야 했는데, 그것도 좋았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짧은 단상을 한두 문장으로 표현하고 기록해 두는 습관은 클래식 디제이를 할 때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행복한 시간은 멘트가 끝나고 음악이 연주되는 시간. 방음이 완벽한 스튜디오 안에서 성능 좋은 스피커로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음악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 


라디오를 들어 보기도 전에 조립을 먼저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인 조회에서 6학년 선배 하나가 단상에 올라 과학기술처장관상을 받았다. 기껏해야 학교장상이 최고인 줄 알던 내게 장관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작은 우물 안에 비친 세상 밖 풍경의 일부를 보았달까. 문과형 인간인 내가 과학과 기술 영역에 뛰어들었다. 과학경시대회와 글라이더 조립 및 띄우기 대회 등은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지만 라디오 조립 대회를 앞두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온갖 부품과 기판, 납땜인두를 앞에 두고 망연히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집안의 유일한 남자였던 아빠가 팔을 걷었지만, 온종일 씨름하고도 라디오에서는 끝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소리 죽여 울던 나를 본 걸까. 아빠가 다음날 동네 전파상 사장님을 초빙해 왔다. 내 인생 첫 번째 과외 수업이었던 셈이다. 전문가는 달랐다. 저항 읽고 계산하는 법과 인두로 납땜을 깔끔하게 하는 법을 배우자 금세 라디오 하나를 뚝딱 조립할 수 있었다. 학교 대표로 대회에 나가던 날, 그 많은 참가자 중 여학생은 나 혼자였다. 각 학교 대표 애들이 반도 조립하지 못했을 때, 깔끔하게 조립한 라디오를 제일 먼저 제출하고 나왔을 때의 쾌감. 그때 나는 좋아하지 않는 일도 잘할 수 있게 되면 기쁨을 준다는 걸 처음 알았다. (결국 원하던 상을 받았고, 그 후 과학에 대한 내 모든 관심은 뚝 끊겼다.) 


라디오를 잘 듣지 않는 건 그래서인지 모른다. 나는 라디오를 들어보기도 전에 조립을 먼저 했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기보다는 진행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라디오는 내게 음악이나 말소리를 듣는 매체이기 전에 띠의 컬러로 읽는 저항 숫자이자 유독한 납땜 연기, 열망으로 똘똘 뭉친 내 의지 같은 것이다. 라디오는 작은 스튜디오 안에 담긴 완벽한 고독이자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의 표상인 것이다. 


시인처럼 내가 키우는 식물들에게 라디오를 틀어줄 일은 앞으로도 없겠지만, 내가 쓴 글을 읽어 주는 일은 따라 해 보고 싶다. 시인의 시는 아름답고 짧겠지만, 내 글은... 우리 집 식물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 모양이다.




*이승희 - <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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